미국 연방 검찰이 적법한 등록 없이 한국 정부를 위해 정보 수집 등을 한 혐의로 기소한 수미 테리 전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에 대해 한국 국정원과 의사소통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소추를 유예했다. 검찰이 기소 유예에 합의한 조건에는 테리와 한국 정부 관계자 간 접촉을 제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테리는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명품 핸드백과 식사 대접 등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
수미 테리 전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 로이터=연합뉴스
검찰은 13일(현지시간) 오후 테리와 기소 유예 합의(DPA)를 체결했다는 서류를 사건을 심리 중인 뉴욕남부지법에 제출했다. 앞서 검찰은 지난 2024년 7월 테리를 미국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FARA는 외국 정부 등을 대리해 활동할 경우 법무부 장관에게 반드시 신고하도록 규정하는데, 테리가 의도적으로 이를 누락했다는 혐의였다.
DPA는 한국의 기소유예와는 다르게 사건의 소추를 일정 기간 유예하고, 해당 기간 피고인이 합의를 이행하면 공소를 취하하는 법률 절차다. 무죄 판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피고인이 합의한 조건을 어기면 소추를 다시 이어갈 수 있다. 유예 기간 동안 공소시효도 정지된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DPA 서류에 따르면 소추 유예기간은 12개월이다. 검찰과 테리가 합의한 조건은 한국과 관련한 접촉 제한이 핵심이다.
법률 위반 금지, 거주지 변경 신고, 허가 없는 미 본토 밖으로의 이동 금지 등 DPA에 수반되는 통상적인 조건 외에 테리에만 적용하는 ‘특별 조건(special conditions)’은 6~8항에 명시됐다. 6항은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어떤 간부나 직원과도 그 신분을 알면서 의사소통(communicate)해서는 안 된다. 향후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들과 예정된 모든 접촉은 재판 전 감독기관(Pretrial Services)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 예상치 못한 접촉을 했을 경우 48시간 안에 감독기관에 알려야 한다”고도 했다.
이는 국정원뿐 아니라 한국 정부 인사들과의 접촉 자체를 포괄적으로 제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자체를 범죄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소추를 유예한 테리의 혐의와 직결되는 행위로 간주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6항에는 지난달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답변서와 마찬가지로 테리와 접촉한 국정원 직원 3명의 실명이 그대로 공개됐다.
7항은 테리가 FARA에 따른 등록 의무가 발생하는 행위를 할 경우 신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8항은 담당 미국 재판 전 감독관의 허가 없이 외국 정부로부터 100달러를 초과하는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서류에는 테리가 동의한 ‘합의된 사실 관계 진술(Agreed Statement of Facts)’도 첨부됐다. 이에 따르면 테리는 국정원 직원들로부터 약 9245달러 상당의 보테가 베네타 핸드백, 루이비통 핸드백 및 돌체 앤 가바나 코트 등을 받고, 최소 19차례에 걸쳐 국정원 직원들의 비용 부담으로 식당에서 식사한 사실을 인정했다.
테리는 국정원 직원과의 공개되지 않은 대화를 거친 뒤 자신이 재직 중이던 기관을 위해 주미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약 3만7000달러를 모금했고, 해당 기관이 대사관에서 직접 발행한 수표 두 장을 수령한 점도 시인했다. 검찰은 앞서 제출한 답변서에서는 해당 자금이 국정원 최고위층으로부터 나왔다고 규정했으나, 이번 서류에는 이런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밖에 테리는 국무장관과의 회의 뒤 국정원 직원에게 메모를 전달한 사실, 한국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고 국정원 직원들이 참석하는 행사를 조직해 의회 보좌진을 위한 해피 아워를 진행한 사실, 한국 정부 관계자의 의향 타진 뒤 연계 기고문을 쓴 사실 등도 인정했다. 앞서 테리가 법원에 증거 배제를 신청했다 기각된 관련 행위 상당 부분을 사실로 시인한 것이다.
다만 FARA 위반의 의도성을 인정하는 내용은 없었다. 검찰이 이에 합의한 건 테리의 고의적 법 위반 혐의를 입증해 얻는 사법적 실익보다 국정원 연관 행위에 대한 테리의 공식적인 인정을 확보함으로써 얻는 정치적 실익을 더 크게 봤기 때문일 수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한국 정부 대리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합의 서류에서 “철저한 조사 뒤 피고인에 대한 소추를 유예하는 것이 미국과 피고인 자신의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고 판단했다”고만 밝혔다.
테리 측 변호인은 언론을 통해 “오랫동안 조국에 충실히 봉사해온 테리 박사는 이번 결과에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 관리들과의 교류가 미국의 이익을 증진하고, 북한과 동아시아를 다루는 미국의 주요 전문가로서 수행한 업무의 일환이었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