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만 나이로도 마흔이 되는 안시영(39)씨는 지난달 29일 서울 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중장년일자리박람회’를 찾았다. 이제 청년을 대상으로 한 일자리 지원 혜택은 받기 어려워져서다. 하지만 이날도 면접 후 남은 건 허탈함이었다. 안씨는 국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중국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한국에서 취업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는 “에콰도르에서 스페인어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말레이시아의 여행 이커머스에서 고객 응대를 하는 등 독특한 경험과 인맥을 쌓아왔는데, 제가 원하는 직무에서 인정받진 못하는 ‘물경력’이 돼버렸다”며 “정부가 지원하는 청년 일자리도, 중장년 일자리도 지금의 저를 위한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8월 11일 중장년 구직자를 위한 일자리 박람회인 ‘2026 하나 JOB 매칭 페스타 in 대전’을 찾은 구직자들이 채용게시대를 살펴보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지난 5월 한 중소기업을 퇴사한 반도체 엔지니어 최모(48)씨도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씨는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니 고연봉 연구직부터 내보내더라”며 “반도체 불량을 분석하는 특수한 분야라 원래 채용문이 넓지 않은데, 택시 운전처럼 아예 다른 일을 하기엔 경력이 아깝고 또 애매하게 젊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는 “기존 연봉 수준 때문인지 자꾸 서류에서 떨어뜨리는데 조율 가능하니 면접이라도 보고 싶다”며 “청년들처럼 채용 연계형 교육이나 인턴 기회라도 얻고 싶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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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쉬었음’ 비중 15년 새 11.5%→19%...구직 어려움 늘어
‘낀 세대’인 40대의 일자리가 위태롭다. 고용지표에서 드러난다. 14일 국가데이터처 통계를 보면, 지난 8월 전체 취업자가 늘었지만 40대는 전년 대비 1만7000명 줄었다. 20대(-16만4000명)와 함께 유일하게 취업자가 감소한 데다, 올해 들어 8개월 연속 내리막이다. 40대 인구 자체가 줄긴 했지만, 40대 종사자 비율이 높은 제조·건설 등 내수 업종 부진, 산업구조 개편에 따른 구조조정, 조기퇴직 등 영향도 맞물렸다.
김지윤 기자
최근 국회미래연구원도 ‘쉬었음 중년’ 보고서에서 이런 흐름을 조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40대 비경제활동인구 중 별다른 이유 없이 일하지 않고 구직 활동도 하지 않는(쉬었음) 인구 비중은 2010년 11.5%에서 지난해 19%로 15년 새 7.5%포인트 상승했다. 부족한 일자리가 구직 의지를 꺾는 주된 요인이었다. 40대 중 ‘구직이 어려워서’ 쉬고 있다고 응답한 비중이 2018년 23.1%에서 2025년 38.3%로 15.2%포인트 늘었다.
인공지능(AI) 확산과 맞물려 고용 불안은 더 심해지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다 시중은행 정보기술(IT) 부문으로 전직한 A씨(43)는 “AI 도입이 본격화하면서 언젠가부터 회사에서 개발 관련한 일을 거의 안 주고 있다”며 “이제 나이가 있고, 두 자녀도 어려 이직이 쉽지 않은데 무언의 퇴사 압박으로 느껴져 매일 불안하다”고 말했다.
김경진 기자
지난해 데이터처가 조사한 결과 40대의 57.4%가 고용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는데, 40~64세 중장년층 중 응답 비율이 가장 높았다. 주된 일자리에서의 이른 퇴직도 미래에 대한 불안을 키우고 있다. 데이터처의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55~64세 취업경험자가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에서 퇴직한 평균연령은 49세로 1년 전(49.2세)보다 더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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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도, 노인도 아닌 '낀 세대'...일자리 지원도 사각지대
중앙일보가 만난 40대 구직자가 공통으로 호소한 건, 청년도 어르신도 아닌 ‘낀 세대’의 설움이었다. 각종 취업 지원의 사각지대이다 보니 맞춤형 일자리를 찾기까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정하석(43)씨는 “제약회사 영업사원, 학원 강사, 호텔 프런트 업무 등을 최소 2년 이상씩 해봤지만, 10년 넘게 일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서 관뒀다”며 “한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은 사람과 비교하면 제 스펙이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길게 보면 더 도전해도 될 나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지윤 기자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가장이 갑작스런 실직 등으로 재정 위기를 맞으면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절망감이 더 클 수 있다. 쓰는 돈도, 빚도 많은 나이대라서다. 최근 한국은행이 김남준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통계 자료를 보면, 올해 2분기 빚이 있는 40대 가운데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는 데 번 돈의 40% 이상 쓰는 비중은 34%에 달했다. 전 연령대를 통틀어 가장 높았다. 40대의 평균 대출 잔액(1억2422만원)도 다른 연령대 모두를 웃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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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두려움도 커져...전문가 "전 국민 경력관리주치의 필요"
14년 차 평범한 직장인이던 정지원(41)씨는 가정 소홀로 이혼 위기에 몰리면서 지난해 5월 사표를 냈다. 이후 아내의 회사까지 폐업하면서 초등학생 아들 학원비라도 벌기 위해 직접 물건을 만들어 온라인에서 팔기 시작했다. 그는 “월 50만원 벌면 미용실에 가려고 했는데 6개월간 머리를 못 잘랐다”며 “40대는 실패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커서 우울증도 겪었다”고 회고했다. 지난달 ‘40대 퇴사러의 생존 모색기’를 담은 책을 출간한 정씨는 “평생 직장이 사라진 시대, 회사에 남기도 떠나기도 두려운 사람들과 저의 시행착오를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핵심 생산인구인 40대의 고용 불안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이영민 숙명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일본 기업은 생애 전환기마다 경력 워크숍을 열어 회사에서 가늘고 길게 갈지, 전직을 준비하는 게 좋을지 되돌아 볼 기회를 주고, 프랑스도 법적으로 사업주가 경력 설계를 돕도록 돼 있다”며 “한국도 ‘전 국민 경력관리주치의’ 제도를 도입해 건강검진처럼 주기적으로 초개인화된 경력 관리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정은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원은 “중년의 실직이 장기화될 경우 소득 공백과 경력 단절이 노후 빈곤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조기에 노동시장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정책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