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잘 벌고 출세하려고 공부만 한 인간들, 윤리고 신념이고 생각 없이 그저 멍청하게 똑똑한 인간들. (중략) 손이나 떨지 않으면 다행인 저 늙은이한테 수술을 맡겨놓는 너네 같은 무책임한 인간들. 환자가 얼마나 고생할지 뻔히 알면서, 목숨이 걸렸는데 ‘어떻게 하면 그냥 넘어갈까’ 생각하는 안일한 인간들. 너네 진짜 후져.”
SBS 금토 드라마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이하 닥터엑스)’가 초반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의사 사회의 권위주의를 정면으로 겨냥한 서사와 주연 배우 김지원의 강렬한 연기 등이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분석이다.
닥터X 스틸컷. [사진 SBS]
지난 9일 첫 방송을 시작한 ‘닥터엑스’는 1회 시청률 11.4%(이하 닐슨코리아 전국 가구)를 기록한 데 이어 2회에서 14.9%로 뛰어올랐다. 글로벌 성과도 이어졌다. 공개 3일 만인 14일 투둠에서 글로벌 비영어 TV쇼 부문 1위에 올랐다.
초반 흥행을 이끈 건 ‘의사를 까는 의사’ 계수정(김지원) 캐릭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계수정은 ‘장희숙 의사용역소개소’에 소속된 프리랜서 외과 의사다. 수술 1건 당 수당을 받고, 무조건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연이은 외과 의사들의 사표로 손이 모자란 구산대학교 서남병원 분원에 파견된 계수정은 잘못된 수술을 계획하는 원장, VIP 환자 수술에만 매달리는 동료 의사들의 부조리를 당당하게 비판하면서도 압도적인 수술 실력으로 위기에 처한 환자를 구한다.
1화에서 계수정이 병원의 권위주의를 꼬집는 ‘사이다 대사’는 온라인에서 선공개되며 드라마 시작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그가 병원 원장의 잘못된 처방에도 쉬쉬하고 있는 동료 의사들과 대치하며 약 1분 간 속사포처럼 일갈하는 장면은 쇼츠, 릴스 영상은 조회 수 합계 800만 회를 넘어섰다.
공희정 평론가는 “계수정은 기존 메디컬 드라마의 주인공들과 달리 병원에 소속되지 않아 철저히 ‘제3자’의 시선으로 의사들을 바라본다”며 “‘낭만닥터 김사부’(2016, 2020, 2023), ‘중증외상센터’(2025) 등 기존 의료 체계를 비판해 온 드라마 역시 주인공이 병원 소속 의사이기 때문에 내부의 화합으로 마무리 지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결말로 귀결됐다면 ‘닥터엑스’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심어준다”고 말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2. [사진 CJ ENM]
그간 나왔던 메디컬 드라마들은 의사들의 동료애와 희생을 주로 다뤘다. 1990년대 ‘종합병원’(1994~1996) ‘해바라기’(1998~1999) 등은 의료 현장의 휴머니즘과 희생, 2000년 이후 ‘슬기로운 의사 생활’ 시리즈(2020, 2021), ‘닥터 차정숙’(2023)는 의사들의 우정, 사랑이 주된 내용이었다. ‘낭만닥터 김사부’ ‘중증외상센터’는 의사들의 사명감, 생명을 위한 돌파력이 강조됐다.
‘닥터엑스’는 초반부터 신랄하다. 도입부에서부터 ‘의사협회’ 출신의 시장 선거 당선을 축하하는 협회 내 목련회의 축하 파티를 비춘다. 연설에 나선 회장은 “의사를 지켜야 의료가 바로 선다는 걸 저 어리석은 것들은 모른다”고 말한다. 이를 씁쓸하게 바라보던 부승관(손현주)은 “환자를 지켜야지 이 썩을 놈들아. 고기를 처먹다 통풍 걸릴 놈들아”라고 중얼거리며 연회장을 나선다.
극 중 의사들은 무능하다. 구서대 서남병원장 김명섭(김종구)은 자신이 라텍스 알레르기가 있는 지도 모른 채 수술실에 라텍스 장갑을 끼고 들어갔다가 졸도한다. 외과의 도윤식(김영민)은 자신이 수술 중인 환자의 암 세포가 예상보다 넓게 퍼져있는 것을 확인하자, 이를 제거하는 대신 개복 부위를 닫는 쪽을 선택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2023년부터 약 2년간 의정 갈등이 이어지며 의사들의 집단 행동과 의료 공백 사태에 실망감을 느낀 시청자들에게, 드라마 속 비판과 폭로가 대리만족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닥터X' 속 장희숙과 부승관 역의 배우 이정은, 손현주. [사진 SBS]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인다. 주연 김지원은 계수정의 거침없는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저음 발성을 연습하고 색조를 덜어낸 메이크업, 짧게 자른 칼 단발 등으로 캐릭터를 완성했다. 계수정의 조력자이자 용역 사무소 장희숙 소장 역을 맡은 이정은, 병상에 누운 김명섭을 협박해 병원장 자리에 오른 부승관 역의 손현주, 수술보다는 병원 내 정치에 몰두하며 자리를 지키는 도윤식 역의 김영민 모두 실력파들이다.
총 12부작인 이 드라마의 흥행세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일본 원작(닥터-X~외과의·다이몬 미치코) 특유의 과장된 전개가 국내 시청자들에게도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의학적 고증이 부족하고 의사 직군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그린다는 비판도 있다. 자신을 정형외과 의사라고 소개한 한 누리꾼은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회에 이 드라마에 대한 심의를 요청했다”며 “의료진을 무능한 악역으로 단순화하며 의료행위의 불확실성마저 외면하는 연출이 반복돼 의료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