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이 한강·황석영·박완서·김애란 등 한국 작가 15명의 책 최소 22종의 디지털 복제본을 불법 다운로드 받은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앤트로픽은 미국 법원의 결정에 따라 한국 작가 작품에 대한 보상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별개로 앤트로픽은 지난해 국내 업체로부터 한국어 책 30만여 권을 구입한 점도 확인됐다.
이날 앤트로픽 저작권 합의 사이트를 확인한 결과, 앤트로픽의 보상 합의 대상 도서 48만2460건 중 한국 작가의 책은 최소 22종 포함돼 있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흰』 등 세 권이다. 김영하 작가의 작품은 『빛의 제국』 등 4권, 신경숙 작가 작품은 『엄마를 부탁해』 등 3권 포함돼 있다. 최소 15명의 작가의 이름이 올랐다.
이 목록은 ‘바츠 대 앤트로픽’ 소송의 결과로 결정된 것이다. 2024년 안드레아 바츠 등 작가 3명은 앤트로픽을 상대로 디지털 해적판 도서를 무단 사용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과정에서 앤트로픽이 2021~2022년 약 400만 건의 디지털 도서를 다운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법원은 ‘최초 출판 후 5년 이내에 미국 저작권청에 등록돼 있어야 한다’ 등의 조건을 걸어 400만 건 중 약 50만 건에 대해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작가 한강이 지난 15일(현지시간) 프랑스 아비뇽에서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법원이 공개한 문서를 보면, 지난 4월 16일 기준으로 저작물 48만2460건 중 44만490건(91.3%)에 대한 보상 청구가 접수됐다. 앤트로픽은 저작물 하나에 3000달러(403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다. 한강 작가 등이 직접 보상 제안을 받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앤트로픽 저작권 합의 사이트에 따르면, 저작권 등록 저자로 번역자인 데버라 스미스가 명시돼 있어 스미스 번역가 또는 판권 에이전시에게 앤트로픽이 보상 제안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바츠 대 앤트로픽’ 소송에선 앤트로픽이 종이책을 대량 매입해 AI에 학습시킨 뒤 파쇄해 폐기한 사실도 드러났다. 디지털 해적판 도서 다운로드가 논란이 되자, 종이책 구입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앤트로픽은 이를 ‘파나마 프로젝트’로 명명했다. 재판 과정에서 앤트로픽은 종이책 구입과 관련한 내부 회의 자료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 자료를 보면, 2024년 11월 27일 기록된 앤트로픽과 한국 도서 유통회사 웅진북센과의 계약 진행 상황이 담겨 있다. 앤트로픽 내부적으로 계약 내용에 대해선 승인이 됐고, 웅진북센과 할인율에 대한 합의도 끝났다고 적혀 있다. 또 웅진북센으로부터 수정 계약서도 받았다고 돼 있다. 책당 가격, 전체 구입 규모는 비공개됐다. 다만 구입 규모는 ‘0.Xm(million·백만)’이라고 돼 있어 수십만 권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
웅진북센은 15일 중앙일보에 “지난해 앤트로픽으로 책을 수출한 게 맞다”며 “중간에 다른 업체의 중개 없이 앤트로픽과 직접 계약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에는 일반적인 도서 공급 거래로 이해했고, 최근 책 스캔 후 파쇄 이슈 이후 AI 업체 및 의심 업체와의 거래는 일절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수출 규모는 비공개했다. 웅진북센은 국내 도서 도매 유통회사 중 1위다.
앤트로픽이 웅진북센으로부터 공급받은 도서 규모는 대략적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웅진그룹이 공시한 사항을 확인하면, 지난해 웅진북센의 국외 매출은 32억7500만원이다. 웅진그룹이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신규 지정되면서 공시한 것으로 2024년 이전 국외 매출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웅진북센은 “2024년 이전 국외 매출은 전체 매출의 0.2% 이하”라고 밝혔다. 웅진북센의 2024년 매출은 1969억원인데, 0.2%면 4억원 정도다. 앤트로픽 대상 매출로 28억원 정도가 갑자기 늘어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책 할인율 등을 고려해 계산하면 25만~30만권 정도가 된다.
앤트로픽 내부 회의 자료를 보면 앤트로픽은 한·중·일 도서를 모두 매입하려고 했다. 2024년 11월 27일 기준으로 일본의 대형 도서유통회사 일본출판판매(닛판·日販)와는 도서 공급 계약을 마쳤다. 또 대만의 도서유통사 연합발행(UDC)과는 계약 논의 중이었다. 앤트로픽은 UDC로부터 중국 본토의 간체 중국어 도서를 수입하려고 했다. 미·중 관계 때문에 대만으로 우회해 중국 도서를 매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고서점. 중앙포토
미국 AI 기업들이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헌책을 매입하려고 한 정황도 확인되고 있다. 지난 8월 교보문고엔 AI 학습용으로 의심되는 도서 대량 주문 문의가 오기도 했다.
미국 AI 기업들의 도서 매집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서용석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는 이런 현상을 ‘AI 모델 제국주의’라고 지적했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무역은 식민지에서 원료를 싸게 가져가 본국에서 가공한 뒤 완제품을 식민지에 비싸게 파는 구조였다. 지금 AI 시대는 한국 사회가 지난 100여년간 축적한 지식이 헌책이라는 원료의 형태로 헐값에 반출되고, 해외 기업의 AI 모델로 가공된 뒤 AI 서비스라는 완제품으로 돌아와 우리가 돈을 쓰게 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시대와 비슷하다는 게 서 교수 설명이다. 서 교수는 “한국이 지식의 생산국에서 지식 원료의 공급국이자, AI 서비스의 소비국 위치로 바뀌는 셈”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