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낸 뒤 가르마를 몇 갈래로 나눈다. 드러난 두피에 세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고 손끝으로 꾹꾹 눌러준다. 샴푸 전에는 스크럽으로 두피 각질을 한 차례 정리해뒀다. 외출할 땐 두피에 자외선 차단 미스트도 뿌린다. 샴푸 한 번, 트리트먼트 한 번이면 끝나던 머리 감기가 이렇게 길어지고 있다.
머리를 감은 뒤 가르마를 나눠 두피에 세럼을 바르는 모습. 얼굴에 스킨케어 제품을 바르듯 두피도 별도로 관리하는 ‘스키니피케이션’ 트렌드가 확산하고 있다. 사진 아베다
얼굴에는 토너와 에센스, 크림을 차례로 바르면서 두피에는 샴푸 하나가 전부였던 셈이다. 머리카락은 신경 써도 그 아래 두피는 관심 밖이었다. 이제는 두피에도 스킨케어처럼 단계가 생겼다. 이른바 ‘스키니피케이션(Skinification)’이다. 얼굴에 쓰던 관리 방식과 성분을 두피·모발로 넓히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CJ올리브영에 따르면 지난해 두피 앰플·세럼 매출은 전년보다 52% 늘었다. 일반 샴푸 매출 증가율(12%)의 네 배가 넘는다. 히알루론산·세라마이드 등 스킨케어 성분을 넣은 고기능성 두피 세럼 매출은 58% 뛰었다.
1시간 샤워도 콘텐트로…길어진 ‘씻는 시간’
지난 8월 걸그룹 아이브의 장원영이 공개한 ‘1시간 샤워법’이 화제가 됐다. 장원영은 아이브 공식 유튜브 영상에서 공연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오면 클렌징과 샤워에 1시간가량을 쓴다고 밝혔다. 몸을 씻고 스크럽까지 하는 과정이 자신만의 관리 루틴이라는 설명이다.
유튜브와 숏폼에서는 이렇게 샤워 과정을 보여주는 ‘샤워 루틴’ 콘텐트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샤워 전 준비부터 씻는 과정, 샤워 후 보습까지 순서대로 보여준다. 해외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들이는 샤워를 ‘에브리띵 샤워(Everything Shower)’라고 부른다. 헤어 마스크와 보디 스크럽, 세럼과 보습제를 차례로 쓰는 과정 자체가 볼거리가 된다. 제품 하나보다 순서와 시간이 중요해진 것이다.
유튜브와 SNS에서는 샴푸 전 브러싱부터 두피 각질 관리, 샴푸 뒤 세럼·토닉까지 여러 단계를 보여주는 ‘샤워 루틴’·‘헤어케어 루틴’ 영상이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목욕탕과 사우나도 다시 주목받는다. 29CM에 따르면 올해 1~9월 ‘사우나’ 검색량은 전년보다 23배 넘게 늘었다. 씻는 일이 해치워야 할 일과에서 공들여 즐기는 시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씻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공을 들이는 곳도 늘었다. 두피도 그중 하나다. 장원영은 앞서 헤어케어 브랜드와 함께한 영상에서 두피 관리법을 따로 소개했다. 샴푸 전에 머리를 빗고, 머리를 감은 뒤에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두피에 세럼을 바른 뒤 마사지하는 식이다. 머리카락을 ‘씻던’ 일이 두피를 ‘돌보는’ 일로 바뀌고 있다.
해외도 다르지 않다. 미국 트렌드 분석업체 스페이트(Spate)에 따르면 2024년 7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미국 구글에서 ‘두피 세럼’ 검색 관심도는 전년 동기 대비 143% 증가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는 두피 관리가 여행 중 체험하는 뷰티 서비스로도 자리 잡고 있다. 외국인 대상 여행 플랫폼 크리에이트립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K두피케어’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219% 늘었다. 이용자의 58%는 영미권, 19%는 유럽권 관광객이었으며 20·30대가 75%를 차지했다. 두피 진단과 1대1 맞춤 관리 같은 프리미엄 체험이 객단가를 끌어올렸다.
샴푸 전, 샴푸 후, 잠들기 전…두피에도 ‘시간표’가 생겼다
브랜드들은 머리 감기 전후의 시간을 잘게 나눠 제품을 내놓고 있다. 모로칸오일 등은 샴푸 전 두피 노폐물을 씻어내는 스크럽을, 아베다는 잠자는 동안 두피를 관리하는 ‘스칼프 솔루션 오버나이트 세럼’을 판매한다. 케라스타즈는 샴푸 후 두피에 바르고 씻어내지 않는 ‘제네시스 세럼’ 같은 두피 전용 세럼을 내놨다.
얼굴에 쓰던 제품과 성분도 두피로 옮겨오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두피 전문 브랜드 라보에이치는 지난 5월 정수리·가르마에 바르는 롤온 선세럼과 두피용 선 미스트를 내놨다.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듯 드러난 두피도 자외선에서 보호하자는 제안이다. 히알루론산과 마데카소사이드, PDRN 등 스킨케어에 익숙한 성분을 담았다.
마민아 디자이너
국내에서는 아예 ‘샴푸 다음’ 제품이 샴푸를 앞지른 사례도 나왔다. 비건 뷰티 브랜드 아로마티카에서는 지난해 머리를 감은 뒤나 마른 두피에 뿌리는 토닉 ‘로즈마리 루트 인핸서’ 매출(약 64억원)이 대표 제품인 로즈마리 샴푸(약 45억원)를 넘어섰다. 2024년만 해도 샴푸(약 55억원)가 토닉(약 45억원)보다 많이 팔렸는데, 1년 만에 순위가 뒤바뀌었다. 올해 상반기에도 토닉(약 51억원)이 샴푸(약 35억원)를 앞섰다. 회사 전체 매출에서 헤어·스칼프 제품 비중은 2024년 47.6%에서 올해 상반기 61.6%로 커졌다. 샴푸 매출이 줄어든 사이 머리를 감은 뒤에 쓰는 토닉 매출은 오히려 늘었다. 샴푸 외 제품이 브랜드의 새로운 매출원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의 관심도 높다. 아로마티카의 서울 북촌 매장에서는 지난 8월 구매 고객의 91%가 외국인이었다. 매출 상위 10개 제품 가운데 7개가 두피·헤어 제품이었다. 회사 전체 매출에서 해외 비중은 2024년 28.1%에서 올해 상반기 35.5%로 높아졌고, 미주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75.9% 늘었다. 스킨케어 성분으로 주목받는 PDRN을 로즈마리에서 유래한 원료로 적용한 두피 세럼도 선보였다.
얼굴에서 두피로…‘샴푸 다음’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
서울 북촌 아로마티카 매장 ‘대청’에서 직원이 외국인 고객에게 두피 케어 제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는 자연 원료를 활용한 스칼프·헤어케어 제품을 체험할 수 있다. 사진 아로마티카
글로벌 시장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는 지난해 9월 보고서에서 헤어케어 시장이 프리미엄화하고 있다며, 그 방향으로 스키니피케이션과 제품 세분화, 과학·임상 기반 제품을 꼽았다. 얼굴용 화장품에서 성분과 제형 기술을 쌓아온 K뷰티에는 기회다. 그 노하우를 두피·모발 제품 개발에도 활용할 수 있다. 스페이트도 보고서에서 미국 두피 세럼 시장에서 K뷰티 브랜드가 성장하고 있다고 짚었다. 두피가 더 이상 뒷전이 아니라 헤어케어 루틴의 출발점이 됐다는 진단이다.
두피 고민도 ‘탈모’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각질과 유분, 건조함, 자외선처럼 고민을 잘게 나눌수록 그에 맞춘 제품도 갈라진다.
경쟁의 무대도 바뀌고 있다. 그동안 샴푸 시장은 거품과 향, 머릿결을 겨뤘다. 이제 브랜드들은 소비자가 머리를 감기 전과 후, 외출할 때와 잠들기 전 가운데 어느 순간에 자기 제품을 놓을 수 있을지를 겨룬다. 샴푸 한 병을 더 파는 싸움에서 욕실 선반의 자리를 하나라도 더 차지하는 싸움으로 바뀌는 셈이다.
아모레퍼시픽의 두피 전문 브랜드 라보에이치가 선보인 두피용 선 미스트(왼쪽)와 롤온 선세럼. 얼굴뿐 아니라 정수리와 가르마 등 노출된 두피까지 자외선을 차단하는 제품이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다만 단계가 늘어난다고 두피가 그만큼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스크럽이나 세럼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은 아니고, 두피 상태에 따라 맞는 관리법도 다르다. 두피 트러블이 심하거나 탈모가 걱정된다면 제품을 늘리기보다 전문가 진단을 먼저 받아보는 게 낫다. 바를 것이 늘어날수록 내게 정말 필요한 단계가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도 커진다.
얼굴을 씻는 일에서 출발한 스킨케어가 토너와 에센스, 앰플로 갈라지며 세분화한 시장이 됐듯 머리 감기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샴푸 거품을 헹궈낸 뒤에 시작되는 두피의 시간은 이제 막 길어지기 시작했다.
b.이슈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이슈를 건져 올립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시대와 호흡해 성장하는 브랜드와 기업을 조명합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