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공지능(AI) 기업의 대량 책 매입에 가장 민감했던 곳은 유럽이었다. 헌책 대량 주문이 가장 먼저 보도된 곳도 유럽이다. 그런 ‘이상 주문’이 실제로 AI 기업의 주문이 맞았던 걸까. 유럽에서 책 스캔(종이 위 내용을 파일로 바꾸는 작업) 회사로 발송된 헌책 화물이 두 건 발견됐다. 18일 수출입·선적 정보를 제공하는 임포트키(ImportKey)를 통해 분석한 결과다.
임포트키에서 확인한 선하증권(Bill of Lading·운송사가 화물을 인수 후 발급하는 증서)에 따르면, 지난 2월 23일 미국 버지니아 노퍽에 한 화물이 도착했다. 네덜란드 노테르담에서 출발한 화물이고, 화물이 처음 인수된 곳은 영국 그레인지머스였다.
흥미로운 부분은 판매자와 구매자. 판매자는 미국 AI 기업 앤트로픽이 도서 조달·배송을 위해 계약한 회사인 ‘베터 월드 북스’(Better World Books·BWB)의 영국 법인이었고, 구매자는 앤트로픽이 책 스캔을 맡긴 회사 데이터메이션(Datamation)이었다. 선하증권의 화물 설명란에는 ‘Used Books, Books’(헌책, 책)라고 적혀 있었다. 화물 무게는 13.748t.
미국에 지난 4월 30일 도착한 화물도 유사했다. 화물 설명란엔 ‘Used Books’라고 돼 있었고, 판매자와 구매자는 역시 BWB와 데이터메이션이었다. 화물이 출발한 항구만 벨기에 앤트워프로 달랐다. 화물 무게는 12.703t이었다. 2월과 4월 화물을 합치면, 책 1권 평균 무게를 400g이라고 했을 때 총 6만6000권 정도였다.
요약하면 두 화물 모두 앤트로픽의 책 조달 회사가, 앤트로픽과 계약한 책 스캔 회사로 헌책을 보낸 것이다.
‘바츠 대 앤트로픽’ 소송 과정에서 드러난 앤트로픽의 책 AI 학습 과정도 같은 방식이었다. BWB가 책을 모아 데이터메이션에 보내면, 데이터메이션은 유압 재단기로 책등을 잘라 스캔한 뒤 파일은 앤트로픽에 넘기고, 책은 폐기한다. 미국 법원에 제출된 문서를 보면, 데이터메이션은 자신들이 6개월 동안 50만~200만권을 스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앤트로픽은 데이터메이션에서 받은 파일을 토큰(AI 처리 데이터의 최소 단위)으로 전환해 AI에 학습시킨다.
올 초부터 유럽에선 ‘이상 헌책 대량 주문’ 사례가 잇따르면서 AI 기업이 헌책을 매집하고 있다는 의심이 커졌다.
영국에서 발송해 지난 4월 30일 미국에 도착한 헌책 화물의 선하증권(임포트키가 재가공). 구매자가 ‘베터 월드 북스’(Better World Books)라고 돼 있지만, 바로 뒤에 ‘C/O(Care of) 데이터메이션(Datamation)’이라고 쓰여 있다. ‘BWB 명의의 화물을 데이터메이션 주소로 보내라’라는 뜻이다. 임포트키 자료 캡처
지난 8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기사엔 한 헌책방 사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사장은 지난 1월부터 책 6000권을 구입하겠다는 주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대량 구매인데도 구매자는 할인 요청 없이 최고가를 지급했다고 밝혔다. 사장은 “업계에서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독일 고서점에는 새벽 시간에 대량 주문이 갑자기 몰려들었고, 아일랜드의 헌책방에는 20여 년 전 아일랜드 정부 특별저축장려계좌(SSIA)를 설명한 투자 안내서 같은 책을 사겠다는 주문이 있었다.
최근 한국에도 AI 기업이 뒤에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헌책 대량 주문 문의가 있었다. 미국 업체 B사는 지난 8월 국내 온라인 서점 예스24와 알라딘이 운영하는 헌책방에 이메일로 연락해 “컨테이너 단위로 헌책을 사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