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경기도 파주 서원밸리CC. KPGA 투어 더채리티클래식 최종 라운드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골에 놓인 파3 2번 홀에서는 몇 개 조가 밀려 줄지어 서 있었다. 비를 맞으며 기다리는 시간은 선수를 초조하게 만든다.
선두로 출발한 정찬민은 달랐다. 그는 2번 홀 티잉구역에서 1번 홀 그린을 바라보며, 악천후 속에 파를 지켜낸 동료들에게 거푸 박수를 보냈다. 경기는 몇 차례 멈췄다 다시 이어졌다. 마지막에 웃은 건 정찬민이었다. 2023년 11월 골프존 오픈 이후 3년 만의 우승이자 통산 3승째다.
정찬민은 삼국지의 장비를 닮았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고, 가끔 덜렁댄다. 어려서 정찬민은 매일 우유를 1L 넘게 마시고, 점심엔 치즈 피자를 한 판씩 먹고, 줄넘기를 하루 2000개씩 했다. 그의 아버지 정원채씨는 “줄넘기는 성장판 자극용이었다”고 했다.
정씨는 스윙보다 거리가 먼저라고도 믿었다. 아들은 장비가 장팔사모를 휘두르듯 드라이버를 휘갈기는 법을 깨쳤다. 키 1m88㎝, 몸무게 120㎏ 안팎에 손은 솥뚜껑만 하다. 주니어 시절부터 ‘살살 치면 300야드, 세게 치면 300m’를 보내던 한국 최고의 장타자였다.
더채리티클래식에서 3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사진 KPGA]
정찬민은 2023년 KPGA 투어에서 2승을 거뒀다. 그때 그는 “샷 거리는 나의 정체성”이라고 했다. 국내에 하나밖에 없다는 단단한 샤프트를 쓰면서도 너무 부드럽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2024년과 2025년, 그의 상금랭킹은 80위권으로 밀렸다. 어깨에 탈이 났다. KPGA 의료 파트너인 부민병원의 도움을 받았다. 이 병원 스포츠재활센터 서경묵 센터장은 “대회장 뿐 아니라 전지훈련에도 물리치료사를 보내 몸을 관리해 좋아졌다”고 말했다.
공도 바꿨다. 정찬민은 예전 공이 드라이버 임팩트 때 페이스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성능과 별개로 그 느낌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새 공을 쓰면서 그는 안정을 찾았다.
무엇보다 생각이 달라졌다. 정찬민은 지금 평균 타수 1위다. 대회 1라운드에서 선두에 나선 뒤 그는 “장타력과 평균 타수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당연히 평균 타수가 더 탐난다. 힘보다 리듬을 타며 치다 보니 샷이 정교해졌다”고 말했다. 거리를 정체성이라 했던 사내가 거리를 내려놓았다.
결정적인 변화는 참모였다. 캐디 김범식씨는 정찬민보다 크다. 키가 193㎝다. 정찬민은 “내가 반달곰이라면 형은 불곰”이라고 했다. 『삼국지연의』의 장비는 유비가 모셔 온 제갈량을 ‘물’이라 비꼬다가 박망파 싸움을 보고서야 고개를 숙였다. 정찬민은 “뭘 하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얘기해 준다. 내가 장비라면 범식이 형은 제갈량”이라고 했다.
퍼트 교습가 출신인 김씨는 경기 전후로 정찬민과 퍼트 연습을 많이 한다. 정찬민은 성격이 급하고,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한다. 경기가 밀리면 마음이 먼저 달려 나간다. 그 고삐를 김씨가 쥐었다. 강풍 속최종 라운드의 여유는 그렇게 생겼다.
정찬민은 원래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퀄리파잉(Q)스쿨 1차 예선부터 치를 생각이었다. 김씨는 “국내 투어 5위 안에 들면 2차 예선으로 직행할 수 있다. 국내에서 5위 안에 못 드는 실력이면 미국에 가도 경쟁력이 없다”고 했다. 정찬민은 국내 투어 5위로 목표를 고쳐 잡았다. 올 시즌 5월 KPGA 파운더스컵과 9월 골프존 오픈에서 잇따라 준우승했고, 이번에 마침내 정상에 섰다. 정찬민은 올해 PGA 투어에 도전한다. 김씨는 2년 전 이승택의 가방을 메고 Q스쿨을 통과한 캐디다. 정찬민은 그 길을 그대로 밟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