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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전문가 칼럼] 하늘을 연 특허, 하늘을 막은 특허

Chicago

2026.10.1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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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정성일

1903년 12월 17일,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 인근의 모래언덕에서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다.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가 조종한 비행기는 불과 12초 동안 120피트, 약 37미터를 날았다. 짧은 비행이었지만 공기보다 무거운 기체로는 인류 최초의 동력•조종 비행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라이트 형제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 곳은 하늘만이 아니었다. 법정에서도 그들의 이름은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형제는 첫 비행보다 약 아홉 달 앞선 1903년 3월 23일 이미 특허를 출원해 두었는데, 1906년 등록된 미국특허 제821,393호의 핵심은 엔진이나 프로펠러가 아니었다. 비행기의 좌우 균형을 제어하기 위해 날개를 비틀고(wing warping), 이를 방향타와 연동시키는 비행 제어기술이었다.
 
단순히 ‘하늘에 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비행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안정적으로 조종하는 것이었고, 라이트 형제는 바로 그 핵심을 특허로 잡았다.  
 
문제는 특허의 범위였다. 경쟁자 글렌 커티스(Glenn Curtiss)는 날개 자체를 비트는 대신 별도의 조종면인 에일러론(aileron)을 사용했다. 라이트 측은 이것도 자신의 특허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1909년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라이트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1913년 연방지방법원은 커티스의 항공기가 특허를 침해한다고 판단했고, 1914년 1월 연방 제2순회항소법원도 이를 유지했다. 항소법원은 라이트 형제를 실용 비행기술의 ‘개척자(pioneers)’로 평가하면서 특허를 폭넓게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승리에는 대가가 따랐다.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는 회사 경영과 특허소송에 상당한 시간을 쏟았고, 소송이 계속되던 1912년 장티푸스로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럽에서는 그 사이 항공기술이 빠르게 발전했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은 라이트-커티스 특허분쟁과 협소한 미국 항공기 시장이 미국 항공기술의 발전을 뒤처지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고 평가한다.  
 
그 결과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났다. 미국이 1917년 참전할 당시 육군이 보유한 항공기는 약 200여 대에 불과했고, 대부분 구식 훈련기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전선에 배치된 미군 항공기 740대 가운데 대다수가 유럽제였다. 비행기를 최초로 날린 나라가 정작 전쟁에서는 유럽에서 개발된 비행기에 크게 의존한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가 나섰다. Franklin D. Roosevelt 당시 해군차관보 등의 문제 제기와 정부의 중재 아래, 1917년 7월 Manufacturers Aircraft Association이 설립되었다. 여러 항공기 회사가 서로의 특허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 바 ‘특허 풀(patent pool)’이었다.  
 
회원사는 기본 항공기 특허들을 사용할 수 있는 대신 항공기 한 대당 200달러의 로열티를 공동기금에 냈고, 그 상당 부분은 Wright-Martin과 Curtiss 측에 돌아갔다. 특허 때문에 막혔던 길을 특허 공유로 다시 연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던 라이트와 커티스의 기업 후계자들은 1929년 합쳐져 Curtiss-Wright Corporation이 되었다. 한때 법정에서 서로를 공격하던 두 이름이 한 간판에 나란히 걸린 것이다.  
 
특허는 발명가에게 정당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 보상이 없다면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며 새로운 기술에 도전할 유인이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특허가 지나치게 넓게 해석되거나 권리가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행사되면 뒤따르는 혁신의 길목을 막을 수도 있다. 특허는 혁신에 날개를 달아주는가, 아니면 족쇄를 채우는가. 라이트 형제의 이야기는 그 답이 특허권 자체보다, 그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공학박사•특허변호사)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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