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경기를 마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알 나스르)가 사우디 국기 색 스카프를 흔들었다. 승리 세리머니라기보다 ‘흔들리지 말고 일상을 지키자’는 무언의 메시지에 가까웠다. 이날 경기는 킥오프 15분 전 보안 경보가 발령돼 1시간 늦게 시작됐다. 예멘의 친이란 반군 후티가 리야드 국제공항을 공격해 300명 넘는 사상자를 낸 지 이틀 만이었다. 호날두가 알 나스르에 입단한 4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광경이다.
사우디 알나스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로이터=연합뉴스
굵직한 국제대회를 잇달아 유치하며 중동의 스포츠 허브로 도약하려던 사우디의 질주에 제동이 걸렸다. 아시안투어 골프대회 사우디 인터내셔널, e스포츠 월드컵, 테니스 이벤트 대회 식스 킹스 슬램 등이 줄줄이 연기됐고, 사이클 어반 월드챔피언십은 아예 취소됐다.
2034년 월드컵을 위해 짓기로 한 경기장 계획도 흔들리고 있다. 지상 350m 높이에 들어설 예정이던 네옴 스타디움을 비롯한 5개 경기장의 건설 계획이 축소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사우디가 2029년 개최하려던 동계아시안게임은 이미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넘어갔다. LIV 골프는 PIF의 자금 지원이 끊기면서 사실상 문을 닫는다. 1년 사이 스포츠계에서 사우디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킹칼리드 공항에서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사우디 국부펀드(PIF)는 2016년 이후 스포츠에만 510억 달러(약 67조7000억원)를 쏟아부었다. 인구의 75%가 35세 미만인 사우디는 스포츠로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청년 일자리를 만들고, 급진 이슬람주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중동 정세가 요동치면서 오일머니를 쏟아부은 국가 전략 사업은 거꾸로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6일 경기 용인시 용인미르스타디움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 대한민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경기. 한국 이강인 손흥민에게 백패스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동의 전운은 한국 축구에도 불똥을 튀겼다. 내년 1월 7일 사우디에서 개막하는 아시안컵이 정상적으로 열릴지 불투명하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대회 준비를 이어가며 11월 말까지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선수와 관중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면 대회를 1년 미뤄 2028년에 치를 가능성도 거론된다.
대한축구협회는 아시안컵에 대비해 다음 달 사우디 원정과 카타르 원정 평가전을 한 차례씩 추진해 왔다. 협회는 두 경기를 모두 카타르에서 치르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카타르 역시 사우디와 같은 여행경보 3단계(출국 권고) 지역이다. 손흥민·이강인 등 선수단의 이동과 안전이 위협받는 만큼 현지 적응 일정 자체를 다시 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