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제주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 육상 마라톤 여자 일반부에서 7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박서연(22)의 다리에는 붉은 혈흔이 선명했다. 그는 경기 뒤 SNS에 이렇게 적었다. “25㎞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생리가 터졌다. 2주 반 전에 이미 했는데…. 배가 쥐어짜듯이 아팠지만, 다시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국내 선수가 경기 중 겪은 생리를 드러낸 건 이례적이다. 월경은 숨겨야 할 약점이었다. 남성 지도자는 물론 같은 여성 동료에게도 쉬쉬했다. 아파도 부상이나 감기를 핑계로 댔다.
2019년 ESPN이 공개한 바디 이슈 화보. 농구선수 리즈 캠비지. 사진 ESPN
10년 전 여성 선수의 몸은 카메라 앞의 피사체였다. ‘보여지는 몸’의 시대를 상징하는 건 미국 스포츠 채널 ESPN의 ‘바디 이슈’다. 2009년부터 해마다 스타 선수들의 누드 화보를 실었다. 테니스와 골프 스타들은 수영복 화보를 찍었다. 국내에서도 KLPGA 투어 선수들의 화보와 골프웨어 패션 붐이 일었다. 단련된 근육이 아름다움으로 조명받는 계기도 됐다. 하지만 화보 속 선수의 몸을 판정하는 건 선수 자신이 아니라 독자와 시청자, 광고주였다.
선수들 안에서 먼저 선 긋기가 나왔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는 2017년 선수회장 명의로 복장 규정을 강화했다. 가슴이 깊게 파인 상의와 레깅스 단독 착용 등을 금지했다. SNS 노출로 이름을 알린 인플루언서형 선수들을 겨냥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몸이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받겠다”는 선언이었지만, 여성의 몸을 단속한다는 반발도 거셌다.
비키니 대신 반바지를 입고 출전한 노르웨이 여자 비치핸드볼 대표팀. 사진 노르웨이비치핸드볼협회
2021년을 전후해선 ‘거부하는 몸’이 등장했다. 노르웨이 여자 비치핸드볼 대표팀은 유럽선수권에서 비키니 하의 대신 반바지를 입고 뛰었다가 벌금을 물었다. 비판 여론이 들끓자 국제핸드볼연맹은 규정을 고쳤다.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은 성적 대상화에 반대한다며 전신 유니타드를 입고 도쿄 올림픽 매트에 올랐다.
변화는 월경으로 이어졌다. 흰옷만 허용하던 윔블던은 2023년, 대회 창설 146년 만에 여자 선수의 짙은 색 속바지를 허용했다. “그날엔 흰 바지가 실용적이지 않다”던 선수들의 목소리가 제도를 움직였다. 잉글랜드 여자축구대표팀도 흰 하의를 짙은 색으로 바꿨다.
잉글랜드 여자축구대표팀 유니폼 하의는 남색이다. AFP=연합뉴스
여성 선수들은 ‘말하는 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중국 수영 선수 푸위안후이는 경기를 마친 뒤 “전날 밤 생리가 시작돼 힘이 없었다”고 밝혔다. 리디아 고(뉴질랜드)는 2022년 허리 부상을 걱정하는 남성 리포터에게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그날”이라고 답하며 웃었다. 도쿄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클라리스 아그베녜누(프랑스)는 소녀 선수들이 부상인 척 숨기지 않기를 바라며 월경 속옷 브랜드의 앰버서더를 맡았다. 12일 일본체육대학에서는 ‘월경과 컨디셔닝’을 주제로 한 토크쇼도 열렸다.
공론화되자 과학이 뒤따랐다. 2019년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한 미국 대표팀은 선수별 생리 주기를 추적해 훈련 강도를 조절했다. 첼시 위민도 2020년부터 주기 기반 맞춤 훈련을 도입했다. 월경은 이제 숨겨야 할 금기가 아니라 데이터로 관리하는 경기력 변수다. 물론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설계된 스포츠에서 많은 여성 선수가 여전히 진통제 몇 알로 버티고 있다.
몸을 말하는 방식도 넓어졌다. 파리 올림픽 7인제 럭비 동메달리스트 일로나 마허(미국)는 다부진 근육과 체형을 스스로 이야기하며 SNS 스타가 됐다.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스포츠 베팅 앱 노빅의 광고 모델로 나선 미국 배우 시드니 스위니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보여지는 몸’을 되살리려는 시도에도 선수들은 입을 열었다. 지난달 정치 성향 논란으로 ‘마가(MAGA) 바비’라 불리는 배우 시드니 스위니가 스포츠 베팅 플랫폼 노빅 광고에 나체로 등장했다. 몸은 럭비공과 농구공으로만 가렸다. 영국 육상 선수 에이미 헌트는 경기 직후 “시드니 스위니, 이게 스포츠를 하는 여성의 모습이야”라고 일갈했다. 스위니가 옛 ‘바디 이슈’ 표지들을 꺼내 들며 반박하자, 선수들은 땀과 근육을 담은 영상으로 답했다.
마라토너 박서연. 사진 박서연 인스타그램
박서연은 SNS에 올린 글을 내렸다. 응원 댓글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 다른 마라톤 대회에서 20대 여성이 숨진 일을 거론하며 “너무 무리했다”는 비판도 따라붙었다. 한국에서 자기 몸을 말한 대가는 아직 선수 혼자 감당하고 있다. 그래도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10년 전 여성 선수의 몸은 카메라 앞에 섰다. 지금 그들은 마이크 앞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