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철강회사에 돈을 빌려줘야 할까. 지금의 배출량만 보고 돈줄을 막으면 저탄소 설비로 바꿀 투자까지 어려워진다. 철강과 시멘트는 우리 생활과 산업에 꼭 필요한 소재다. 이런 고탄소 산업의 생산방식을 바꾸는 데 필요한 돈을 공급하는 것이 ‘전환금융’이다. 그 돈으로 실제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지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다.
고배출 산업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업을 전환으로 인정해야 할까. 정부가 지난 2월 발표한 전환금융 가이드라인은 두 경로를 열어 놓았다. 하나는 기후에너지환경부(기후부)가 정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에 해당하는 사업을 지원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 감축 경로와 투자계획 등을 토대로 기업의 전환전략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현재 배출이 많더라도 믿을 만한 전환계획이 있다면 금융을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두 경로를 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리 정한 기준은 기업 간 비교를 쉽게 하고 심사 비용을 줄여준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과 기업마다 다른 사정을 모두 담기는 어렵다. 기업별 계획을 살피면 이런 한계를 덜 수 있지만, 계획의 타당성을 판단할 전문성이 필요하다.
두 경로 중 어느 한쪽의 검증이 느슨하면 준비가 부족한 기업이 그쪽으로 몰릴 수 있다. 금융회사가 실행할 능력이 있는 기업과 그럴듯한 계획만 내놓은 기업을 구별하지 못하면, 먼저 비용을 들여 전환을 준비한 기업이 오히려 불리해진다. 이를 막으려면 어느 경로로 들어오든 감축 목표와 투자 일정, 자금 조달계획을 확인해야 한다. 공통 기준의 편리함과 개별 심사의 유연성을 함께 취하돼, 그만큼 심사의 책임도 무거워지는 셈이다. 예산 편성이나 설비 발주, 구매계약은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판단할 중요한 근거다.
가이드라인은 계획 이행이 미흡하고 개선도 미진하면 금융회사가 우대 혜택을 줄이거나 취소할 수 있도록 했다. 자발적인 지침이라 이 조항이 실제 계약과 사후 점검에서 작동하는지가 중요하다.
당장의 배출 감축이 장기적인 전환을 가로막지는 않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공정 효율을 높여 당장의 배출량을 줄였더라도, 그 투자로 낡은 설비의 수명이 많이 늘어나면 근본적인 전환은 늦어질 수 있다. 공정 개선을 지원할 때 고탄소 설비를 더 오래 쓰게 만드는 함정은 없는지 설비 교체·폐쇄 일정과 후속 투자까지 살펴야 한다.
물론 심사를 잘한다고 투자가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저탄소 전력과 수소를 제때 공급받을 수 있을지, 더 비싸진 제품을 누가 사줄지 불확실하면 기업은 결정을 미룬다. 은행도 돈을 돌려받을 근거가 부족하다. 대출 이자를 조금 낮춰주는 것만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다.
정책금융은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나눠 맡아야 한다. 상용화 초기에는 지분투자를, 사업성은 있지만 담보가 부족한 기업에는 보증을 제공할 수 있다. 공공이 부담할 위험의 범위와 기간을 정하고, 사업의 진척에 따라서 자금을 집행하는 방식이다.
저탄소 제품에 붙는 추가 비용, 이른바 ‘그린프리미엄’을 감당할 구매자가 없다면 설비자금만 지원해서는 부족하다. 공공조달과 민간의 장기 구매계약을 통해 구매 물량과 기간을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경우 감축 성과를 확인해 가격 차이 일부를 한시적으로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판로가 보여야 기업도 투자하고 금융회사도 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
여기서 부처 간 정책 조율이 매우 중요하다. 산업통상부의 기술전환 일정, 기후부의 전력·인프라 계획, 금융당국의 지원기준이 서로 맞아야 한다. 설비는 완공됐는데 전력이 들어오지 않거나 제품을 팔 시장이 없다면 금융지원을 해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부처별 계획을 모아놓는 것을 넘어 예산과 집행 일정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
지난 7일 발표된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은 이런 연결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탄소감축을 산업경쟁력과 연계하고 금융·에너지·지역정책을 함께 추진하겠다는 방향도 타당하다. 정부는 2026~2035년 재정 200조원과 기후금융 790조원 이상 등 약 1000조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다만 기후금융 790조원은 올 2월 이미 발표됐기 때문에, 이를 모두 새로 마련한 예산처럼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이제는 추진 중인 업종별 감축 로드맵을 구체화하고, 초안이 마련된 전환금융 실무 모범규준을 확정해 금융회사의 심사와 사후관리에 연결할 차례다. 세부 기준이 마련되기 전까지 무엇을 근거로 지원하고 언제 다시 검토할지도 알려줘야 한다. 민관합동 K-GX 협의체에는 부처별 일정과 예산의 엇박자를 조율할 책임과 점검 절차를 분명히 부여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정책의 정치화도 경계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이 뒤집히면 수십 년을 내다보는 장기 투자는 어려워진다. 발표를 서두르느라 현장의 의견과 검증을 충분히 거치지 못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어떤 근거로 정책을 선택했는지 공개하고, 수정이 필요하면 이유와 일정을 설명하는 것이 정책에 대한 신뢰를 지켜나가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정책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지원 액수가 아니라 실제 변화다. 얼마나 많은 자금을 공급했는지보다 그 돈으로 어떤 설비가 들어섰고, 생산 공정이 어떻게 바뀌었으며, 온실가스 배출이 얼마나 줄었는지를 따져야 한다. 생산이 감소해 줄어든 배출량을 공정 개선의 성과로 포장해서도 안 된다. 금융 지원이 기업의 실질적인 투자와 탄소 감축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그것이 대규모 지원계획을 내놓은 정부가 이제부터 증명해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