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포 머더(A Talent for Murder)·위커(Wicker) 23일 나란히 스크린서 신작 선보여 고립된 여성의 삶 서로 다르게 표현 살인 미스터리와 판타지 로맨스 대조
‘탤런트 포 머더’에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연기한 헬렌 미렌 [Bleecker Street]
10월 23일, 두 편의 영국 영화가 나란히 극장에 걸린다. 안톤 코르빈 감독의 ‘탤런트 포 머더(A Talent for Murder)’와 알렉스 휴스턴 피셔, 엘리너 윌슨 감독의 ‘위커(Wicker)’다. 주연은 헬렌 미렌과 올리비아 콜먼이다. 둘 다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둘 다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했다. 이번에는 둘 다 세상 밖으로 밀려난 여성을 맡았다. 비슷한 처지의 두 여성을 두 배우는 어떻게 다르게 그렸을까.
‘탤런트 포 머더’의 배경은 1995년 스위스다. 미렌은 ‘리플리’ 시리즈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연기한다. 소설의 주인공 톰 리플리는 남의 삶을 차지하려고 거짓말과 살인을 서슴지 않는 캐릭터다.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를 기억할 것이다. 알프스에 은둔한 노작가에게 뉴욕 출판사가 젊은 에이전트 에드워드 리지웨이(올든 에런라이크)를 보낸다. 리플리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받아오는 것이 그의 임무다. 앞서 같은 일로 찾아간 직원은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하이스미스는 그를 조롱하고 겁주며 내쫓으려 하지만 에드워드는 버틴다. 결국 그녀는 조건을 건다. 들키지 않는 살인을 함께 설계해 보자는 것이다. 이야기는 소설 속 무대인 로마로 건너가고, 에드워드는 점점 리플리를 닮아 간다. 리지웨이라는 이름이 리플리와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존 인물을 내세웠지만 전기 영화는 아니다. 하이스미스가 말년에 스위스에서 은둔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의 이야기는 허구다. 미렌에게 실존 인물은 익숙한 영역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2세,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를 거쳤다. 그녀는 인물을 흉내 내기보다 그 안의 권위와 고집을 붙잡는다. 실제 하이스미스도 사람보다 달팽이를 더 아꼈다는 말을 들을 만큼 괴팍한 작가였다. 영화 속 하이스미스 역시 사람을 싫어하고, 상대를 시험하며 즐기는 여성이다. 그녀의 고립은 스스로 고른 것이다. 미렌은 이 고립을 지적인 위협으로 바꾼다. 사진작가 출신인 코르빈 감독은 눈 덮인 알프스와 노작가의 집을 차갑고 정적인 화면에 담아 그 고립을 거든다.
‘위커’는 어른을 위한 동화다. 가부장 질서가 단단한 중세 마을에서 콜먼은 이름 없이 ‘어부 여인’으로 불린다. 몸에서 비린내가 나고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을의 놀림감이다. 조롱이 심해지자 그녀는 반쯤 빈정대며 바구니 장인(피터 딘클리지)에게 버들가지로 엮은 남편을 주문한다. 그런데 버들 남편(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묵묵히 일하고 아내를 위한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비웃고, 다음에는 질투한다. 두 사람의 순진한 사랑은 위선적인 마을을 뒤흔든다. 원작은 우르술라 윌스존스의 단편 ‘위커 허즈번드(The Wicker Husband)’다.
콜먼은 코미디에서 출발했다. 오랫동안 웃기는 조연에 머물다가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에서 학대받는 여성을 연기하며 드라마 배우로 인정받았다. 이후 ‘더 파더(The Father)’와 ‘로스트 도터(The Lost Daughter)’로도 오스카 후보에 올랐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울음과 당황과 수치가 그대로 드러나고, 우스꽝스러운 순간과 비참한 순간이 한 장면에 함께 있다. 어부 여인의 고립은 세상이 강요한 것이다. 콜먼은 이 고립을 연민으로 바꾼다.
두 배우의 차이는 같은 여왕을 연기한 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더 퀸(The Queen)’에서 미렌이 연기한 엘리자베스 2세는 감정을 누르고 왕관을 지키는 군주였다. 콜먼은 ‘더 페이버릿(The Favourite)’의 앤 여왕을 병들고 유치하고 애처로운 여성으로 그렸다. 드라마 ‘더 크라운(The Crown)’의 엘리자베스 2세에게서도 의무에 지친 중년의 피로를 먼저 보여 줬다.
미렌이 권위를 지켜 내는 배우라면, 콜먼은 권위를 허물어 그 아래의 사람을 보여 주는 배우다.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자라 형사 드라마 ‘프라임 서스펙트(Prime Suspect)’로 대중 스타가 된 여든한 살 배우와, TV 코미디에서 자란 쉰두 살 배우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번 두 역할도 그 차이를 그대로 따른다. 하이스미스는 세상을 거부했고, 어부 여인은 세상에게 거부당했다.
다만 ‘탤런트 포 머더’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원작은 조애나 머리스미스의 희곡 ‘스위스(Switzerland)’로, 두 사람이 한 집에서 벌이는 기싸움이 핵심인 실내극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로마로 넓히면서 그 밀실의 긴장을 상당 부분 놓친다.
그 결과 영화의 무게중심이 미렌보다 에런라이크 쪽으로 기운다. 에런라이크는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Solo: A Star Wars Story)’에서 쓴맛을 본 뒤 ‘페어 플레이(Fair Play)’와 ‘웨폰(Weapons)’으로 재기한 배우다. 이번에는 리플리를 직접 연기하지 않으면서 리플리를 연기한다. 선한 얼굴 뒤에 무언가를 숨긴 청년을 연기한 그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시상식 시즌을 앞둔 개봉인 만큼 오스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미렌은 이미 여우주연상 캠페인에 나섰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 노장 배우라는 점은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조건이다. 그러나 엇갈린 평가와 상대역에게 쏠린 관심은 부담이다.
콜먼은 장르부터 불리하다. 판타지 코미디는 아카데미가 쉽게 손을 들어주는 장르가 아니다. 콜먼은 코미디 부문을 따로 두는 골든글로브나 영국 아카데미상에서 기회를 노려볼 만하다. 두 배우 모두 오스카 후보에 이름을 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두 영화에서 고립된 여성은 한쪽에서는 살인을, 다른 쪽에서는 사랑을 상상한다. 하이스미스에게는 미렌의 차가운 위엄이, 어부 여인에게는 콜먼의 무너지는 얼굴이 가장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