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감독의 첫 AI 단편 영화 '웜트레인'. 주인공뿐 아니라 지하철 승객 등 단역 캐릭터를 AI로 생성할 경우 비슷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지 일일이 구글 등에 검색해가며 검증해 만들었다. 사진 크리에이티브 망고
“햇병아리 단편 감독 입장에선 제작비를 줄일 수 있겠구나, 싶어 기뻤어요. 배우로선 너무 슬펐습니다. 은퇴해야 하나….”
지난 18일 한 인공지능(AI) 영화 대회에서 심사를 맡은 배우 겸 감독 이정현의 말이다. 생성형 AI 영화의 완성도가 실사 촬영에 가깝게 높아지면서 AI 캐릭터에 일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다. 기술의 비약적 발달로 ‘AI 시네마’ 시대의 첫발을 뗐지만, 한국은 아직 저작·초상권, 창작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 비미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중국계 영상 AI 모델에 한국 느와르풍 뒷골목 장면을 주문하니, 아는 한국 배우 얼굴이 나왔다”는 목격담이 나와도, 현재로선 규제할 길이 없다. 유럽연합(EU)의 경우 AI 무단 학습 등을 강력하게 법령으로 막고 있다. 미국에선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권리 침해에 맞선 소송이 잇따른다. 업계에선 한국도 정상적 학습권과 보상체계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고 본다. 지난 15일 폐막한 부산영화제 산하 아시안 콘텐츠&필름 마켓(ACFM)에서 김영덕 ACFM 위원장은 “기술이 급격히 진화하는 만큼 어떤 부분을 조심하고 어떤 에셋(asset·이미지 자산)을 공공적으로 풀지 빨리 규칙을 세워야 하는데, 법률적 논의가 느리다”고 지적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 민규동 감독도 “한국은 현재 법이 못 따라간 사각지대에서 생성형 AI를 무단 활용할 수 있다. 창작자에겐 천국이지만 곧이어 (권리 분쟁이) 복잡해지는 법적 다툼의 시대가 코앞에 와있다”고 말했다. 또 “빅테크들은 IP(지적재산) 소유자에게 일회성 사용료를 줄 테니 학습을 허락해달라고 유도하지만, 일단 학습된 저작물이 AI에서 무한히 활용될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렇게는 안 된다는 반박이 맞선다”면서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올해 들어 유튜브에선 배우 염혜란(왼쪽부터), 마동석을 연상시키는 AI 캐릭터가 등장하는 AI 영상물이 게재되 논란이 됐다. 사진 유튜브 캡처
지난해 저작권위원회는 생성형 AI 활용 영상도 인간의 창작적 기여가 인정되면 저작권을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권한슬 감독의 AI 단편 ‘원 모어 펌킨’, 강보현 감독의 ‘가족추상’ 등이 AI 활용 저작물로 등록됐다. 반면 AI 창작물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경우에 대해서는 마땅한 기준이 없다. AI 단편 ‘웜 트레인’을 제작 중인 김성수(‘서울의 봄’) 감독은 “혹시 비슷한 사람이 있을까봐, AI로 생성한 모든 캐릭터를 구글(검색 엔진)로 돌려보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선 AI 영상에 관한 공론화가 활발하다. 올 2월 중국계 AI 영상 모델 시댄스가 실존 할리우드 스타들의 액션 합성 영상을 감쪽같이 생성하자, 할리우드는 거세게 반발했다. 이후 대부분의 생성형 영상 AI에선 실명을 넣어 ‘OO와 비슷한 인물’을 주문하거나, 실제 사진을 입력하면 생성이 막히게 조치 됐다. 일본에선 유명인의 음성을 무단 생성하는 피해가 잇따르자 배우·성우단체가 지난 15일 목소리 권리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은 올들어 배우 염혜란·마동석 등 유명 배우 초상과 목소리를 무단 도용한 AI 영상물이 유튜브에 게재돼 논란이 됐지만, 사회적 대책 마련에 이르지 못했다.
하정우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달 7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스틸레이' 시사회ㆍ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 한국은 자체적인 생성형 영상 AI 기술도 공백 상태다. 하정우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달 100% AI 장편 영화 ‘스틸레이’ 시사회에서 “콘텐트 생성 분야는 (국내 AI 기술이)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다”면서 “영상 콘텐트는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가 훨씬 어렵다”며 전략 수립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영화계에선 AI 기술 수준이 중국을 당장 따라잡기 힘든 만큼, AI 영화 제작 과정에서 타인의 창작물이나 초상권을 무단 학습하지 않도록 투명하고 철저하게 검증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인 당면 과제로 거론된다. 글로벌 시장에서 권리 분쟁 우려 없이 유통 가능한 콘텐트를 양산하는 것이 AI 영상 시대의 경쟁력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김성수·이명세 감독 등과 AI 영화를 개발 중인 제작사 망고크리에이티브 장훈 대표는 “AI 영화가 시험 단계를 벗어나 상업화되는 시점부터는 무단 도용하지 않은 콘텐트라는 ‘신뢰 보증’이 IP만큼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면서 “AI 기술로 세계 어디서나 K콘텐트를 흉내 낼 수 있는 시대에 한국은 저작권 분쟁 없는 ‘클린 콘텐트’로 차별화 지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