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속삭임을 들었다. 늘 마음보다 한발 앞서 달리던 발걸음이 느려지고, 별것 먹지 않아도 배는 더부룩해졌으며, 등에 나지막한 통증이 자리를 잡았다. 몸은 더 이상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견뎌주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늙어가는구나.’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일흔이 넘으면 다섯 해 간격으로 늙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실감 나지 않았다. 일흔다섯이 되어서도 씩씩하게 산을 오르고,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던 나는 속으로 갸우뚱하기까지 했다.
여든이라는 나이는 아직 한참 먼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 기슭에 다다르니 몸이 먼저 알아채고 조용히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가만히 내 하루를 들여다보았다. 이 고단함은 단지 세월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너무 많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정성을 다해 남편의 식사를 준비하고, 손을 맞잡고 병원에 다니며, 수필 공부를 하러 다니고, 친구들과 산길을 걷고, 사람들을 만나 접대를 주고받으며 배우고, 글을 쓰며 하루를 채웠다.
생각해 보면 몸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라는 시간의 무게 위에 책임과 열정을 쉼 없이 얹어놓았으니 몸인들 어찌 버겁지 않았겠는가.
노년에 찾아온 갱년기인가? 과부하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몸이 보내는 신호는 “이제는 내 짐을 조금 덜어 달라” 는 조용한 부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는 내려놓기로 결심 했다.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스스로를 위해 내려놓는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내게는 십여 년 넘게 함께한 수필이 있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지난 삶을 다독이고 내 영혼을 쉬게 하는 시간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더 많은 일을 채우기보다, 더 깊은 마음을 채우며 살아가고 싶다.
늦은 오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 문득 지나온 삶이 떠올랐다.
나는 다른 사람의 걸음에 마음을 맞추며 살아왔다. 누군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앞서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걸음이 느린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재촉했다.
그러는 동안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도, 뺨을 스쳐 가는 서늘한 바람도 충분히 바라보지 못했다.
숲속의 나무들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자란다. 어떤 나무는 빨리 키를 키우고, 어떤 나무는 오랜 세월 나이테를 촘촘히 새기며 천천히 자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느리게 자라는 나무를 탓하지 않는다. 제 몫의 계절을 견디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숲은 아름다워졌다.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타인의 속도가 아니라 내 발바닥이 땅을 딛는 감각을 믿으려 한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흙냄새를 품으며, 내게 허락된 오늘을 천천히 살아가려 한다.
오늘 밤에는 아픈 등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말해주고 싶다. 더부룩한 배도 살며시 토닥이며 그동안 참 수고했다고, 조금 늦게 가도 괜찮다고.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조용히 속삭인다.
“그동안 참 애썼다고. 남을 돌보느라, 일상을 일구느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품느라 단 한 순간도 대충 살지 않았구나.”
속도가 줄어든 것은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보라는 뜻일 것이다. 의욕이 조금 줄어든 것은 마음에 힘을 빼고 평안을 배우라는 뜻일 것이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너무 앞서 달려가는 나를 붙잡아 삶을 오래 사랑하게 하려는 몸의 다정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은 삶이 시들어가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고 단단한 열매를 맺어가는 시간이라고 믿고 싶다.
조금 슬퍼질 때면 창밖의 하늘을 오래 바라본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내 손을 쓰다듬어 본다.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글로 세상을 품을 수 있으며, 나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 마음속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지금의 너도 충분히 아름답다.”
오직 내 삶의 속도로, 내게 허락된 풍경을 하나하나 다정히 바라보며, 오늘도 조용히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