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그들의 탈북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어서, 혹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은 사람도 있었다. 탈북민이라는 이름 뒤에 저마다의 삶과 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장진성 탈북 시인이 북한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라는 시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부모에게 자식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딸에게 백 원이라는 가격을 붙여야 했다니. 그것은 딸을 살리기 위해 가슴을 찢어야 했던 어머니의 절박함이었다. 나는 이 시에서 ‘딸을 판 어머니’가 아니라 ‘딸을 살리고 싶었던 어머니’를 보았다.
문학 강의 시간에 누군가 이 시를 낭송했다.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울림에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특히 말을 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딸을 판 돈 백 원으로 산 밀가루빵을 딸의 입에 밀어 넣어주며 통곡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누군가 물었다. “벙어리 어머니가 어떻게 딸에게 용서를 빌 수 있느냐”고. 용서를 비는 일이 반드시 말로만 가능한 것일까. 그 울음 속에는 미안함과 죄책감, 딸을 살리고 싶은 간절함과 이별의 절망이 모두 들어 있다. 내게는 어머니의 통곡이 “나를 용서해다오”라는 말로 들렸다.
이 시를 읽으며 얼마 전까지 봉사했던 한인 단체가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매주 화요일 정부 지원으로 무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아침 9시부터 나눠주지만 7시부터 줄을 서는 사람들도 있었다.나는 그분들을 늘 밝게 웃으며 대했다. 도움을 받는다는 이유로 자존심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건물 앞에서 오랫동안 노숙하던 사람을 누군가가 쫓아내는 모습을 보았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모인 장소에서조차 누군가는 도움받을 자격이 있고, 누군가는 사라져야 할 존재로 취급되고 있었다.
가난은 사람에게서 먹을 것만 빼앗지 않는다. 때로는 인간으로서 지키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위협한다. 그러나 아무리 궁핍해도 한 인간의 가치까지 가난해지는 것은 아니다. 백 원에 딸을 내놓았다고 해서 그 아이의 가치가 백 원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찾아온 탈북민들이 또 다른 멸시와 소외를 겪지 않기를 바란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동정의 대상이 되기보다 한 사람의 이웃으로 존중받기를 소망한다.
딸을 백 원에 내놓아야 했던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그 절박함을 헤아리는 마음이었다. 오늘 우리 곁에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도 어쩌면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