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이 재정 압박과 복지 재원 확보 등을 이유로 고소득층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면서 글로벌 차원의 ‘부자 증세’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증세를 추진하는 정부와 세 부담을 피해 거주지나 자산을 옮기려는 수퍼리치 간 갈등도 커지고 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지난 5일(현지시간) “노동당 정부 출범 이후 억만장자들의 이탈로 1200억 파운드(약 212조원) 이상의 자금이 영국 밖으로 유출됐다”고 보도했다. 인도 출신 철강 거물 락시미 미탈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난해 세법상 거주지를 영국에서 스위스로 옮겼다. 이로 인해 300억 파운드(약 53조원) 이상의 순자산이 영국을 떠난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 최대 납세자 가운데 한 명인 헤지펀드 매니저 크리스 로코스도 그리스로 이주했다. 그의 순자산은 약 30억 파운드(약 5조3100원)에 달한다.
노동당 정부의 잇따른 증세 정책이 부유층 이탈의 배경으로 꼽힌다. 특히 영국 정부는 지난해 4월 대대적인 세제 개편을 단행하며 200년 넘게 유지해온 비거주자 과세 특례, 이른바 ‘논돔(non-dom)’ 제도를 폐지했다. 논돔은 영국에 거주하면서도 세법상 주소지 또는 영구적 거주지를 해외에 둔 개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기존 제도 아래에서 영국 내 소득에는 세금을 내되 해외 소득은 영국으로 송금하지 않는 한 과세를 피할 수 있었다.
개편된 규정에 따르면 새로 영국에 입국한 사람은 최초 4년간 해외 소득에 대한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이후에는 전 세계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해 과세된다. 세제 혜택을 누리기 위해 런던에 거주해온 글로벌 자산가들에게 영국에 머물 유인이 줄어든 셈이다. 여기에 노동당 정부가 추가 증세 가능성까지 시사하면서 해외 이주를 선택하는 고액 자산가들이 늘고 있다.
지난달 8일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회장이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증세를 둘러싼 정부와 부유층의 갈등이 해외 이주로 이어진 사례는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당시 대통령이 최고세율 75%의 부유세 도입 계획을 밝히면서 논란이 일었다. 프랑스의 국민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등 실제 이주·국적 변경 사례가 이어졌다. 프랑스 최고 부호인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회장도 벨기에 국적을 신청했다가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철회했다.
노르웨이에서도 부유세 인상이 자산가들의 해외 이주를 촉발했다. 중도좌파 정부가 2022년 11월 부유세율을 인상하자 고액 자산가들의 이탈이 이어졌다. 가디언은 “2022년 한 해에만 노르웨이의 억만장자와 백만장자 30명 이상이 해외로 이주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직전 13년간 해외로 떠난 초고액 자산가 수를 웃도는 규모다.
지난 8일 구글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이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행사에서 참석한 모습. AP=연합뉴스
미국에서는 연방정부 차원의 증세뿐 아니라 주별 과세 정책을 피해 거주지를 옮기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순자산 10억 달러(약 1조3200억원) 이상 억만장자를 대상으로 자산의 5%를 일회성으로 부과하는 이른바 ‘억만장자세’가 논의되자 구글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네바다주로, 래리 페이지는 플로리다주로 거주지를 옮겼다.
자산가들은 세 부담이 커지면 거주지나 자산을 다른 지역·국가로 이전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스웨덴에서도 부유세가 도입되면 해외로 이주하겠다는 억만장자가 나왔다. 음악 스트리밍 업체 스포티파이의 공동창업자 마르틴 로렌손은 부유세 도입에 반대하며 해외 이주 가능성을 시사했다. 세수 확대를 위한 정부의 증세 시도와 자산가들의 이탈 움직임이 맞물리면서 부유세의 실효성을 둘러싼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부유세가 기대만큼의 세수 확대로 이어지지 못한 사례도 있다. 프랑스는 부유층의 반발 속에 부유세를 도입했지만, 세수 확보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2015년 폐지했다. 당시 부유세는 프랑스 국민 60%가 찬성할 만큼 여론의 지지를 받았지만, 과세 대상이 2000~3000명에 그쳐 재정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 프랑스 재무부에 따르면 부유세로 거둬들인 세금은 2013년 2억6000만 유로, 2014년 1억6000만 유로로 2년간 총 4억2000만 유로(약 6241억원)였다. 이는 전체 소득세 700억 유로(약 104조)의 1%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미국 민주당 내부에서도 억만장자세를 둘러싼 견해차가 뚜렷하다. ABC방송은 지난 3일(현지시간) “민주당 내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로 카나 하원의원이 억만장자세 도입을 놓고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뉴섬 주지사는 증세가 기업가들의 다른 주 이주를 부추길 수 있다며 관련 발의안에 강하게 반대해왔다. 반면 카나 의원은 “뉴섬은 자신의 선거 자금을 대주는 억만장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며 억만장자세를 적극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