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기자의 눈] 왜 피해자가 증명해야 하는가

Los Angeles

2026.10.27 18:19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김여진 인턴기자

김여진 인턴기자

2024년 10월, 아이비리그 명문인 코넬대학교의 한 사교 클럽에서 발생했던 집단 성폭행 사건이 2년 만에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당시 이 대학의 한 여학생은 남학생 7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검찰이 용의자들을 기소하지 않아 사건은 잊힌 듯했다. 그런데 지난 9월 피해를 주장한 여성이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후 공개된 자료들은 검찰 수사에 의문을 던졌다. 검찰은 대학 경찰의 면담 녹취록 등 주요 자료를 검토하지 않은 채 불기소를 결정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충분했는지를 둘러싼 비판이 커졌다.
 
사건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자, 익숙하고도 잔인한 풍경이 되풀이됐다. 온라인에는 피해자의 신원으로 추정되는 정보가 퍼졌고, 다른 여성들이 ‘제인 도’로 잘못 지목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 정치평론가는 소송을 제기한 여성의 실명을 찾아내 공개하겠다는 공언까지 했다.
 
이 모순이 오래도록 마음에 박혔다. 검찰은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충분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코넬대 총장은 사건 이후 여학생이 학교를 떠났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세상은 그녀에게 놀랍도록 무관심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내려 혈안이다. 변태적 관심이 모여들었다.
 
피해자를 향한 시선은 그의 신원뿐 아니라 사건 이후의 행동과 태도 하나하나까지 파고들었다. 사건 직후 ‘제인 도’가 일부 남학생과 친근한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그의 성폭행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뉴욕 포스트에는 “진짜 성폭행 피해자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칼럼까지 실렸다.  그러나 ‘피해자다운 행동’이라는 기준은 누가 정했는가.
 
철저한 사실 확인은 분명 필요하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심증만으로 유죄 판결을 내려선 안 된다. 그러나 피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피해자를 의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사건을 따라가며 줄곧 마음에 걸렸던 질문이 있다. 우리는 ‘혹시’라는 가능성을 내세워 피해자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미 힘겨운 날을 겪고 있는 피해자가 자신의 행동을 끝없이 설명하고 정당화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피해 사실을 밝히려던 사람이 도리어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검증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고통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미국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1973년 ‘강간(Rape)’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시 속 여성은 자신이 겪은 일을 신고하기 위해서는 경찰을 찾아가야 한다.  
 
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은 실성한 듯 빙빙 도는데, 당신은 그에게 자백해야만 한다, 당신은 당신이 당한 그 범죄에 대해 유죄이므로. 그리고 당신은 그의 푸른 눈이, 당신이 알고 지내온 그 모든 가족의 푸른 눈이 가늘어지면서 번들거리는 것을 본다. 그의 손이 세부 사항들을 타이핑한다. 그는 당신의 최악의 순간을 타이프라이터로 적어 내렸고 그것을 서류철에 넣어 보관했다.”
 
 시는 여성이 사실을 말할지, 아니면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고 하려던 말을 삼킨 채 집으로 돌아갈지 망설이는 질문으로 끝난다.
 
그 시가 발표된 지 반세기가 흘렀다.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제도는 발전했다지만, ‘최악의 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이 마주하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반세기 전의 시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씁쓸한 현실이다. 1973년 시 속의 여성이 겪었던 두려움은 2026년에도 현재형이다.

김여진 / 인턴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