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의 산책로를 따라 화암사를 거쳐 신선대로 오르는 방법도 있다. 켄싱턴리조트 산책로는 울산바위를 배경 삼을 수 있는 덕에 요즘 젊은 러닝족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백종현 기자
찬바람이 불면 고성에 갈 이유가 늘어난다. 신선대(645m·성인대)에 오르면 단풍 물든 울산바위의 압도적인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포구로 내려가면 막 올라오기 시작한 도루묵으로 마음마저 든든해진다. 햇메밀 막국수에 뜨끈한 문어국밥까지, 산행 뒤 먹을 것을 고르는 일도 즐겁다. 단풍 산행에 제철 별미를 곁들여 늦가을 고성 여행을 즐겼다.
바다보다 산
신선대(성인대)는 설악산 울산바위의 웅장한 자태를 정면으로 조망할 수 있어, 사계절 인기가 많다. 화암사에서 1시간이면 정상에 닿는다. 백종현 기자
고성에서는 으레 동쪽으로 눈길이 간다. 포구와 바다가 있는 쪽이다. 가을에는 바다를 잠시 등져도 좋겠다. ‘높은 산을 낀 고을(高城)’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내륙으로 들수록 풍경이 깊어진다.
지난 22일 고성 신선대에 올랐다. 설악산 북쪽 신선봉(1204m)의 허리께 자리한 암봉이다. 비교적 짧은 산행으로도 울산바위의 웅장한 자태를 마주할 수 있어 MZ세대 ‘산린이(등산 초보)’ 사이에서 퍽 유명한 코스다.
오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산 중턱의 화암사 주차장에서 출발하거나,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에서 산책로를 따라 사찰로 접어들거나.
화암사가 신선대 산행 코스의 들머리다. 화암사 종각에서 본 수바위의 모습. 백종현 기자
단풍철에는 화암사 진입로부터 차가 밀리니 리조트 쪽이 대안이겠다. 1시간가량 더 걷지만, 차 안에 갇혀 있을 시간에 대신 가을 풍경을 누린다. 이 산책로는 뜻밖에도 걷는 이보다 달리는 이가 더 많다.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달리는 모습을 담을 수 있어 전국의 러닝 크루가 꾸준히 찾는단다.
켄싱턴리조트 관계자도 “러닝족이 늘면서 가족층 중심이었던 리조트가 확 젊어졌다”고 소개했다. 울산바위 아래서 달리기 인증 사진을 찍는 시대라니. 오래된 명산 앞에서도 유행은 부지런히 바뀐다.
화암사 일주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金剛山 禾巖寺(금강산 화암사)’라고 적힌 현판이 선명했다. 알고 계시나. 신선봉은 금강산 1만2000봉의 남쪽 첫 봉우리로 꼽힌다. 화암사 주지 대현 스님이 “오늘 보니까 단풍이 제법 예쁘게 내려왔다”며 “금강산 줄기에 자리해 정기가 남다른 곳이니, 좋은 기운을 얻어 가시라”고 덕담을 건넸다.
올가을은 늦더위의 영향으로 단풍이 예전만 못하다. 신선대에서 본 설악산 울산바위 일대의 가을 풍경. 백종현 기자
화암사 입구에서 수바위와 시루떡바위를 거쳐 1시간쯤 만에 신선대에 닿았다. 숲에 가렸던 시야가 단숨에 트였다. 운동장처럼 너른 바위 지대에 올라서자 울산바위의 여섯 봉우리가 정면을 가로막았다.
산 아래에서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지만, 이곳에서는 봉우리마다 다른 얼굴이 보였다. 암벽에 새겨진 주름과 깊이 파인 골짜기까지 선명했다. 고개를 돌리니 화암사 너머의 고성 앞바다까지 단번에 펼쳐졌다.
신선대에 오르면 고성·속초 시내와 푸른 동해 바다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백종현 기자
늦더위 탓에 올해는 설악산도 단풍이 예년만 못하다고들 한다. 그 아쉬움은 신선대에 두고 내려왔다. 울산바위에 동해까지 한눈에 담고 나니 단풍 빛깔을 따질 마음이 사라졌다.
늦가을의 별미
고성 ‘산북소나무막국수’ 의 순메밀막국수. 메밀을 껍데기째 갈아 면에 거뭇거뭇한 빛깔이 도는 것이 특징이다. 백종현 기자
산행 끝의 허기는 반갑다. 막국수 고장에 왔으니 메밀국수부터 한 그릇. 이른바 ‘면 성애자’들이 기다리는 계절이 늦가을과 겨울이다. 햇메밀로 만든 국수를 맛볼 수 있어서다.
고성에서 3대를 잇는 ‘산북소나무막국수’를 찾았다. 메밀 함량 100%의 순메밀 막국수(1만1000원)를 내는 집이다. 글루텐이 없어 쉽게 끊어지는 순메밀은 반죽부터 까다롭다. 뜨거운 물로 단단하게 반죽한 상태로 세 시간 넘게 나뒀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다시 여러 번 치대 면을 뽑는다.
전철재 사장이 “메밀을 껍데기째로 갈아 면에 거뭇거뭇한 빛깔이 도는데, 이를 고성에서는 ‘토면(土麵)’이라 부른다”고 알려줬다. 갓 뽑은 메밀국수에 동치미 국물을 붓고 들기름과 설탕을 조금 더해 입에 넣었다. 한 젓가락만으로도 면의 차이가 느껴졌다. 툭툭 끊어지는 식감 뒤로 담백한 맛이 따라왔다.
고성 아야진항의 어민들. 도루묵은 자망을 이용해 떼로 건져 올린다. 부두로 돌아오면 손으로 일일이 그물에서 생선을 떼어내야 한다. 백종현 기자
다음 날 아침 8시 아야진항을 찾았다. 꼭두새벽부터 바다에 나갔던 고깃배들이 부두로 돌아와 곰치(미거지)와 대구 등을 부려놓고 있었다. 부두 곳곳에서 반가운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가득 쌓아 올린 도루묵 더미다.
찬물을 좋아하는 도루묵은 산란기인 10월 말부터 12월 사이 얕은 연안으로 몰려온다. 어부들이 이때에 맞춰 자망(가로로 긴 사각형 그물)을 놓는다. 어부 박영철씨는 “많이 잡힐 때는 한 배에서 200두름(4000마리)도 건진다”고 말했다. 이날은 도루묵 한 두름이 4만2000원 선에 거래됐다.
아야진항 앞 ‘어부밥집’의 도루묵찌개. 도루묵은 이맘때부터 12월까지만 맛볼 수 있는 한정판 별미다. 도루묵찌개는 해장용으로도 술안주로도 제몫을 톡톡히 한다. 백종현 기자
항구 앞 ‘어부밥집’은 선장이 잡아 온 생선으로 밥상을 차린다. 도루묵찌개와 도루묵구이(각 4만원)를 하나씩 주문했다. 이맘때 도루묵은 살보다 알이 더 푸짐하다.
알을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톡톡 터졌다. 고소한 맛에 자꾸 젓가락이 갔다. 유영미 사장은 “도루묵은 겨울 생선으로 알려져 있지만, 끝물로 갈수록 알이 단단해진다”며 “오히려 늦가을 도루묵이 더 야들야들하니 맛있다”고 설명했다.
고성 ‘베짱이 문어국밥’에서 맛본 문어국밥. 백종현 기자
요즘 고성을 찾는 젊은 여행자에겐 ‘문어국밥’이 인기란다. 말 그대로 문어를 올린 국밥이다. 문어야 봄부터 두루 잡히지만, 뜨끈한 국밥으로 즐기기에는 찬바람 부는 이맘때가 제격이다. 삶은 피문어를 얇게 썰어 올리는데, 샤부샤부 먹듯이 먼저 문어와 숙주를 건져 먹고 다음에 국밥을 뜨는 게 순서다. 국밥을 한 그릇 비우고 나니 고성의 차가운 바닷바람도 한결 견딜 만했다.
여행정보
김경진 기자
화암사에서 수바위와 시루떡바위를 거쳐 신선대에 오른 뒤 화암사 숲길로 돌아오는 코스는 약 3.2㎞ 길이다. 쉬엄쉬엄 두세 시간을 잡으면 된다. 짧은 산행이지만, 등산화를 챙기는 게 좋다. 화암사와 켄싱턴리조트 설악밸리 모두 입장료가 없다. 아야진항 앞에 갓 잡은 도루묵을 내놓는 식당이 몰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