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 (East of Eden) 제임스 딘 영화, 넷플릭스 7부작으로 재탄생 플로렌스 퓨, 캐시의 잔혹한 삶 섬뜩하게 열연 과거 상처에 무게 실으며 원작의 철학은 퇴색
캐시 에임스 역의 플로렌스 퓨. [Netflix]
악은 타고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존 스타인벡은 1952년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 캐시 에임스를 소개하며, 평범한 부모에게서도 악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고 썼다. 남편을 쏘고 갓 태어난 쌍둥이를 버린 뒤 유곽을 차지하는 캐시는 미국 문학에서 손꼽히는 악녀다. 넷플릭스의 7부작 시리즈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은 70여 년 만에 그 문제의 여인을 다시 그린다.
엘리아 카잔 감독의 1955년작 ‘에덴의 동쪽’은 제임스 딘의 영화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던 칼의 얼굴은 한 세대 청춘의 초상이 됐다. 영화는 원작의 끝부분, 1차 대전 무렵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만을 다루었다. 그 결과 원작보다 훨씬 단순한 아버지와 아들의 멜로드라마가 됐다. 캐시는 몬터레이에서 유곽을 운영하는 ‘케이트’로 등장한다.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를 찾아 몰래 뒤를 밟는 칼, 사업 자금을 빌리러 온 아들에게서 자기를 닮은 구석을 보는 케이트. 영화 속 캐시는 칼이 자기 안의 어둠이 어디서 왔는지 확인하는 통로다. 캐시를 연기한 조 밴 플리트는 20분이 채 안 되는 분량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러나 캐시가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르렀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번 시리즈는 그 빈자리에서 시작한다. 각본을 쓰고 제작을 이끈 조이 카잔은 엘리아 카잔의 손녀다. 할아버지가 영화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손녀가 이어 간다.
애덤 트래스크(크리스토퍼 애벗)와 캐시 에임스(플로렌스 퓨). [Netflix]
피투성이가 된 젊은 여자(플로렌스 퓨)가 코네티컷의 한 농장 앞에 쓰러진다. 농장에는 트래스크 형제가 산다. 온순한 형 애덤(크리스토퍼 애벗)은 그녀를 간호하다 사랑에 빠지고, 거친 동생 찰스(마이크 파이스트)는 처음부터 그녀를 의심한다. 캐시에게 결혼은 숨을 곳과 돈을 얻는 수단이었다. 결혼 첫날밤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시동생의 방을 찾아갈 정도다.
애덤은 캐시를 데리고 캘리포니아 살리나스 계곡으로 떠난다. 그곳에 자신만의 에덴을 일구겠다는 꿈을 품고서. 그러나 그것은 애덤의 꿈일 뿐이었다. 쌍둥이를 낳은 캐시는 떠나겠다고 말하고, 문을 막아선 남편에게 망설임 없이 총을 쏜다. 그녀는 이름을 케이트로 바꾸고 유곽에 들어가 끝내 주인 자리까지 차지한다.
쌍둥이를 키우는 하인 리 역의 훈 리. [Netflix]
버려진 쌍둥이 칼(조셉 자다)과 아론(조 앤더스)은 하인 리(훈 리)의 손에서 자란다. (리는 영화에는 아예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상심한 애덤이 아이들 이름조차 짓지 못하자, 이웃 새뮤얼 해밀턴(키어런 하인즈)과 리가 창세기를 읽으며 이름을 붙여준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착한 아론, 자기 안의 어둠을 두려워하는 칼.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다음 세대에서 되풀이된다.
전쟁이 다가오자 칼은 콩값이 오를 것을 내다보고 투기에 나선다. 그렇게 번 돈을 아버지에게 내밀지만, 아버지는 전쟁으로 번 돈이라며 받지 않는다. 형제의 경쟁은 그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3대에 걸친 이야기를 일곱 시간에 담았다.
작품의 중심은 단연 플로렌스 퓨의 연기다. 퓨는 ‘레이디 맥베스’에서 숨 막히는 결혼에 갇혀 살인으로 출구를 찾는 여자를 연기했다. ‘작은 아씨들’에서는 얄미운 막내로만 기억되던 에이미에게 설득력을 불어넣었다.
캐시는 그 두 캐릭터가 만나는 자리에 있다. 퓨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진심을 말하는 순간에도 상대가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얼굴이다. 웃음과 경멸이 한 얼굴에 동시에 담겨 있다. 진심인지 속이려는 것인지 관객은 끝내 알 수 없다. 그래서 캐시에게서 눈을 떼기 어렵다.
유곽 주인 페이(마사 플림프턴)와 캐시의 관계를 그린 5화는 시리즈에서 가장 뛰어난 회차다. 캐시를 딸처럼 아끼는 페이를 캐시가 서서히 무너뜨리는 과정은 공포 영화보다 서늘하다. 페이가 따뜻하고 허술한 만큼 캐시의 계산은 더 차갑게 보인다.
훈 리가 연기한 리도 눈여겨볼 캐릭터다. 리는 밥을 짓고, 장부를 정리하고, 아이들을 키운다. 작품은 굳이 말하지 않지만 그는 사실상 쌍둥이의 어머니다. 원작의 리는 일부러 서툰 영어를 쓰며 백인들의 편견 뒤에 숨는 지식인이다. 시리즈는 원작에 남아 있던 당대의 인종적 시선을 걷어내고 그의 도덕적 무게를 살렸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를 아시아계 하인이 채운다는 설정은 1955년의 할리우드가 다룰 수 없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야심이 곧 가장 큰 약점이다. 조이 카잔은 캐시의 어린 시절 사건에 설명의 무게를 싣는다. 캐시의 잔혹함은 남성 중심 사회가 가한 폭력의 결과로 읽힌다. 캐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 시대 여성에게 결혼과 출산 말고 어떤 선택지가 있었는지 생각하면 억지스러운 해석도 아니다.
문제는 원작의 캐시가 설명을 거부하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스타인벡은 그녀를 이유 없는 악으로 그렸다. 이유를 붙이는 순간 캐시는 이해할 수 있는 피해자가 되고, 원작이 던진 불편한 질문은 힘을 잃는다. 시대의 피해자 캐시는 2026년의 시선에는 맞을지 몰라도 스타인벡의 캐시는 아니다.
캐시에 집중하는 동안 다른 캐릭터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애덤은 내내 상처받는 남자에 머문다. 크리스토퍼 애벗의 성실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자체가 밋밋하다. 찰스는 동부에 남은 뒤 이야기 밖으로 밀려난다. 새뮤얼 해밀턴과 같은 조연은 훌륭하지만 등장이 너무 짧다.
애초 8부작으로 구상했다가 7부작으로 줄인 것도 이 문제를 키웠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급하게 압축된다. 칼 역의 조셉 자다는 무난한 연기를 보이지만, 칼이 더는 주인공이 아니다 보니 형제의 비극이 주는 울림은 1955년 영화보다 약하다.
원작의 핵심은 ‘팀셸(timshel)’이라는 히브리어 한 단어다. 죄를 다스리는 것도, 다스리지 못하는 것도 결국 사람의 선택이라는 뜻이다. 원작에서 이 단어의 뜻을 찾아낸 사람은 리다. 그는 이 한 단어를 이해하려고 중국인 노인들과 2년 동안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시리즈의 마지막도 이 단어로 돌아간다. 그러나 시리즈는 칼에게는 스스로의 길을 고를 기회를 주지만 캐시의 악행은 어린 시절의 상처로 설명하는 데 그친다. 1955년 영화가 칼의 이야기였다면 이번 시리즈는 캐시의 이야기다. 캐시에게도 같은 기회를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