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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세상 읽기] 걷어냄, 그리고 빚어짐

Los Angeles

2026.10.2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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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다비드상으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끝내 돌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내들이 서 있다. 미켈란젤로가 깎다 멈춘 ‘노예(포로)’ 연작이다.  
 
한 사내는 머리 위 돌덩이를 떠받치듯 팔을 치켜들었지만, 그 머리는 아직 돌 속에 묻혀 있다. 몸의 절반은 사람, 절반은 여전히 돌이다. 거친 표면에는 돌을 쪼던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얼굴마저 희미한 그 사내에게서 우리는 뜻밖에 제 얼굴을 본다. 되고 싶은 나와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나 사이, 우리는 모두 반쯤 돌 속에 산다.
 
미켈란젤로는 인문학자 베네데토 바르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각을 덜어내는 예술로 설명하며, 재료를 덧붙여 형상을 만드는 방식과 구별했다. 돌을 깎는 조각과 진흙을 붙여 가는 소조를 떠올리면 차이가 선명하다. 하나는 걷어내고, 하나는 더해 간다.
 
성경은 이 두 손길을 함께 말한다. 이사야는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사 64:8). 창세기에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할 때(창 2:7) 쓰인 히브리어 ‘야차르’도 토기장이가 빚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에 걷어냄을 잇는다.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그 벗음조차 우리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빚으시는 이도, 깎으시는 이도 하나님이다. 우리의 몫은 그 형상을 가리는 것들을 기꺼이 내놓는 일이다.
 
그 길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본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빌 2:7). 그 비움은 자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이웃을 살리려 내려가신 사랑이었다. 그러니 우리의 걷어냄도 자기 혐오가 아니다. 교만과 조급함, 남과 견주는 마음을 그분의 정에 맡겨 하나님과 이웃이 들어설 자리를 내는 일이다.
 
이 비움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소조에 비긴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한 줌씩 더해 가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여러 직분을 주신 것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 4:12).  
 
공동체는 누군가를 깎아내릴 때가 아니라 서로의 은사와 상처까지 끌어안아 붙여 갈 때 온전해진다. 우리가 덜어낼 것은 자신을 부풀리는 마음이고, 더해 갈 것은 서로를 품는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방향을 뒤집어 산다. 스마트폰 인물 모드를 떠올려 보자. 한 사람은 또렷해지고 곁의 세계는 흐려진다. 내 삶의 시선은 누구를 배경으로 밀어내고 있는가. 답장을 기다리는 친구, 말수가 부쩍 줄어든 동료일지 모른다. 나에게는 날마다 덧붙이면서 곁의 사람들은 깎아내고 있지는 않은가.
 
뒤집힌 방향이 바로잡히는 자리, 두 손길이 가장 깊이 만나는 자리가 성찬이다. 예수께서는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하셨다(눅 22:19). 떼어진 그 몸을 함께 받을 때 “많은 우리가 한 몸”이 된다(고전 10:17).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각자의 완성도가 아니라 함께 받은 그 사랑이다. 걷어냄이 곧 빚어짐이 된 것이다.
 
다시 그 복도를 떠올린다. 돌 속의 사내들은 실패작이 아니다. 그 복도는 완성된 형상을 향해 나 있다. 반쯤 돌 속에 사는 우리도 아직 그 복도에 서 있다.  
 
오늘 나는 그분의 정 앞에 무엇을 내어 드려야 하는가. 그리고 이번 주에는 내 곁의 누구에게 사랑 한 조각을 붙여 주어야 하는가.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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