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오래 버틴 재정준칙들은 진보 정부가 호황기에 만들었다. 노르웨이 노동당 정부는 2001년 석유기금의 기대수익 4%만 예산에 쓰기로 했다. 칠레 사회당 정부는 같은 해 구리 호황의 세수를 쓰지 않고 쌓기로 했다. 기준 가격과 성장률은 독립된 전문가들이 정했다. 스웨덴 사민당 정부는 1990년대 위기 뒤 흑자 2%를 목표로 못 박았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돈이 넘칠 때, 복지를 지키려고 규칙을 세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진보 정부는 사상 최대의 세수 호황에 오히려 규칙을 풀어버렸다. 이재명 정부의 2027년도 예산안 얘기다.
석유기금 기대수익의 4%만 지출
이재명 정부는 빚 얻어 확장 재정
재정 균형 잃으면 프랑스처럼 돼
내년 예산안의 차별점은 지출의 크기보다 규칙의 거부에 있다. 국세 194조원이 더 들어오는데도 국채를 106조원 더 발행하고, 이렇게 재정을 확장한 다음 그 중 104조원을 미래대응기금에 현금으로 쌓는다. 기금에는 적립 상한도 인출 요건도 없다. 적립의 기준인 ‘추가세수’는 정부가 정하는 세입예산을 넘는 금액이니, 세입예산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적립이 달라진다. 세입 부족을 메운다는 명목의 전출은 변경 한도에서 빠진다. 운용 심의회의 위원장은 기획예산처 장관이다. 국회는 ‘금융기관 예치 95조9000억원’ 한 줄만 심의하게 돼 있다. 사상 최대의 깜깜이 예산안에 ‘블라인드’ 심사를 요구한 것이 이번 예산안의 본질이다. 기금이라는 제도는 껍데기고, 재량이 알맹이다. 재량이 왜 문제인지는 경제학이 오래전에 밝혔다.
노벨경제학상 공동수상자인 키들랜드와 프레스콧은 매 순간 최선으로 보이는 재량이 합리적 기대를 무너뜨려 결과를 나쁘게 만든다는 것을 보였다. 또 알레시나와 타벨리니는 견제가 약한 정부일수록 빚과 항구적 지출로 다음 정부의 손을 묶는다는 것을 보였다. 빚으로 쌓은 미래대응기금과 되돌릴 수 없는 현금급여 급증은 예측 그대로다. 국회의 견제가 약할수록 이 유인이 강해진다는 점도 입증됐다.
재량은 현 정부에게 자유이나, 다음 정부에는 족쇄가 된다. 다음 정부가 짊어질 족쇄의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국가채무 스트레스 테스트를 직접 해 보았다. 정부의 중기재정운용계획을 그대로 두고 메모리 가격만 정상 수준으로 되돌려 계산하면, 국세는 2028년부터 3년에 걸쳐 291조원 줄고 기금은 2029년에 바닥난다. 2030년 국가채무비율은 정부 계획에 따른 기준선보다 최대 13.6%포인트 높아진다. 정부 계획의 유일한 전제는 호황이 5년 내내 이어진다는 가정인데, 계획서 어디에서도 검증된 바 없다. 재정당국의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는 대목이다.
재량이 쌓이게 되면 그 끝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의 프랑스다. 프랑스는 1973년 이후 한 해도 균형재정을 이루지 못했다. 정부마다 이유가 있었다. 위기, 전염병, 에너지, 연금. 그 결과 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119%에 이르렀고, 이자는 2027년 900억 유로를 넘어 국방비와 교육비보다 커진다. 2년 사이 두 정부가 예산 때문에 무너졌고, 지금 정부도 의회 과반이 없어 예산안을 제힘으로 통과시키지 못한다. 프랑스의 문제는 빚의 규모보다, 재량이 쌓인 뒤에는 어떤 정부도 되돌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 채무비율은 프랑스의 절반이다. 그러나 호황의 재정 풍요를 재량으로 탕진하는 방식은 같다.
재량 과잉에 대한 유일한 치료는 원론의 회복이다. 반도체 세수의 정상 수준은 독립 전문가 패널이 산정하고, 그 초과분은 법에 따라 국채 상환과 적립에 자동으로 나눈다. 세입예산으로 추가세수를 정하는 지금의 방식은 없앤다. 기금은 안정화계정과 투자계정으로 나누어, 적립은 결산에서 확인된 흑자로만, 인출은 세수 감소율 같은 객관적 요건으로, 운용은 해외 안전자산으로 한정한다. 새 현금급여에는 예비타당성 통과와 일몰시한을 요구한다. 세입 전망과 준칙 이행은 독립 재정기구가 평가한다. 노르웨이와 칠레의 진보 정부가 남긴 것은 지출의 규모가 아니라 제도였다. 그들에게 규칙은 긴축의 도구가 아니라 복지의 보험이었고, 정부의 손을 묶는 것이 아니라 다음 정부와 다음 세대의 구속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지금의 세수 호황은 길어야 몇 해다. 그 사이에 규칙을 세우느냐 재량을 굳히느냐가 그 뒤 10년의 재정을 정한다. 그 선택은 이번 예산 심의에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