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소아응급실 압수수색 규탄 및 진료권 보호 촉구 긴급기자회견'에서 류정민 대한소아응급의학회장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월 30일 경찰이 아주대병원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를 압수수색한 것을 두고 센터 소속 교수 3명이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의료계와 경찰 간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정상진 경찰청 형사국장과 김홍근 경기남부경찰청장 직무대행이 아주대병원을 방문해 조재호 병원장과 이지숙 센터장에게 사과했지만 이 센터장은 “압수수색 영장이 청구된 경위와 집행 과정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며 이날 저녁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의료계에선 의료 현장에서 경찰의 강제수사를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수사에 필요한 자료를 응급실 외부에서도 얻을 수 있으므로 응급실에 강제 진입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고 있다. 이형민 인제대학교일산백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실 컴퓨터 기록은 병원 전산실에서도 조회할 수 있다”며 “압수수색까지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고 했다. 강보승 한양대학교구리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도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응급실의 특수성을 고려해, 환자를 돌보고 있는 의료진 말고 원장·부원장 등 관리자를 조사했어야 했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소아응급실 압수수색 규탄 및 진료권 보호 촉구 긴급기자회견'에서 이지숙 아주대 소아응급의료센터장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소아응급의학회와 전국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협의회는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필수 의료 현장에 대한 경찰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류정민 학회장은 이날 “응급실은 성역이 아니며 의료진은 진실 규명에 언제나 협조할 것”이라면서도 “압수수색 당시 경찰의 진입으로 응급실 운영과 진료가 영향을 받았다”며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석 교수들은 기자회견에서 ▶필수 의료 현장에 대한 압수수색의 원칙적 제한 ▶무분별한 영장 집행에 대한 통제 장치 마련 ▶환자 사망에 대한 과도한 현장 조사 관행 개선을 요구했다.
지난달 28일 경찰청 블라인드에 올라온 게시글. 사진 블라인드 캡처
반면 경찰 사이에선 응급실을 ‘치외법권’ 취급할 순 없다는 반발이 나오며 의료계와 경찰 직업군 간 갈등으로 논란이 번지고 있다. 지난달 28일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 경찰청 게시판에는 이번 압수수색이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적법하게 집행한 것이란 내용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이 정한 합법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밟았을 뿐”이라며 “생명을 다루는 숭고한 직업일수록 억울한 죽음(이라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 누구보다 투명하게 조사에 임해야 한다”고 썼다. 댓글에선 공감하는 반응과 함께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수사기관을 우롱해선 안 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탈경(경찰 탈출)밖에 답 없음. 애사심 사라진다” “우리도 다들 수사경과 포기하고 나간다 해야 변화가 생길까”라며 회의감을 내비친 사람들도 있었다.
서울 시내 한 경찰서의 형사과장은 “영장이 적법하지 않았다면 검찰과 법원 단계에서 반려됐을 것”이라며 “영장이 나왔는데 응급실이라 해서 진입하지 않으면 그게 더 문제”라고 했다. 경찰 지휘부는 지난달 29일 아주대병원을 찾아 의료진이 겪은 고충과 불편에 유감을 표하고 사과했으나, 압수수색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인정한 것은 아닌 걸로 전해졌다.
함영욱 경기남부청 광역수사단장이 지난달 30일 보건복지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국회방송 캡처
압수수색 당시 진료에 차질이 있었는지를 두고는 경찰과 의료진의 설명이 엇갈리고 있다. 이 센터장은 지난달 15일 기자회견에서 “압수수색 당일 경찰이 1시간30분간 진찰실에서 컴퓨터 세 대를 확인하고 간호파트장을 1시간여 조사하는 동안 의료진 업무가 중단됐다”고 설명했다. 반면 경찰은 진료 방해를 최소화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경찰청이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압수수색 당일 사진과 시간별 기록에 따르면, 경찰은 이날 병원 법무팀과 수간호사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빈 진료실 두 곳의 컴퓨터를 15분간 압수수색했다. 다른 처치실 한 곳은 환자 진료가 끝난 후에 2분간 압수수색했다.
논란이 이어지자 전문가 사이에선 수사 지침에서 더 나아가 필수 의료 분야의 면책 특권을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미국의 엠탈라(EMTALA, 응급의료치료 및 적극적 분만법)를 본딴 ‘K-엠탈라’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엠탈라는 환자의 지불 능력과 상관없이 응급의료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법으로, 병원에 응급 환자 진료 의무를 부과하는 대신 의료진에게 면책 특권을 일부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엠탈라에 따르면 1차적인 의료조치를 충실히 수행했다면 오진이나 나쁜 결과만을 근거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 교수는 “필수의료에 한해서만이라도 진료 의무와 면책 권한을 보장한다면 응급실 뺑뺑이도, 의사들의 줄사직도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경찰은 의료 현장의 특수성을 고려한 수사 준칙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번 주 김종철 경찰청장 직무대행과 만나 필수의료 분야 수사 절차에 관한 지침을 논의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논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