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초상화가 그려진 현수막이 미국 법무부 밖에 걸려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자 각국이 향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의장은 4일 X(옛 트위터)에 “양심 때문이든, 생활비 부담 때문이든 미국인들은 전쟁 반대(NO TO WAR)라고 말했다”며 “우리는 이 메시지를 지지한다”고 썼다. 민주당의 승리를 트럼프 행정부의 대이란 군사정책에 대한 미국 유권자들의 거부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가 국제적 돈줄과 협박 세력에 봉사하려고 이런 국민의 뜻을 배신한다면 우리의 ‘반대’에는 ‘악몽’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모즈타바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도 이날 자신의 웹사이트를 통해 발표한 서면 성명에서 “미국의 정권 내 당파 변화로 대이란 정책이 달라질 것이란 기대는 착각”이라며 공격 재개 시 전쟁이 확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란은 선거 이후 전쟁 재개 여부에 촉각을 기울여 왔다.
중국은 미·중 관계의 안정적 관리에 방점을 뒀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같은 날 정례 브리핑에서 “중간선거는 미국의 내정”이라며 “중국은 미국과 함께 양국 정상이 이룬 중요한 합의를 계속해서 잘 수호하고 이행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소통을 강화하고 이견을 적절히 처리하며, 협력을 확대해 존중·공평·대등에 기반한 중·미 건설적 전략 안정 관계를 구축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정상회담 등을 통해 마련한 합의 이행을 강조함으로써 미국의 국내 정치 변화와 별개로 양국 관계의 안정성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중국 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민주당의 의회 장악이 미국의 대만 정책에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중국 매체 펑파이에 따르면 천둥샤오 상하이국제문제연구원장은 “미국에서 대외 문제는 행정부가 의회보다 큰 재량권을 갖고 있는 만큼 현재의 대중 정책이 근본적으로 뒤집힐 가능성은 크지 않다”면서도 “미국 의회가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를 추진하도록 더 큰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 3월 19일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는 기하라 미노루 일본 관방장관. 연합뉴스
일본에서는 민주당의 의회 장악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적 선택이 더욱 예측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국내 정치에서 입지가 좁아진 트럼프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외교적 성과를 서두르면서 북한·중국·러시아와 ‘대담한 거래’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4일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의 한 간부는 선거 결과에 대해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아사히는 “일본이 우려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 가능성이 더욱 낮아진다는 점”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직접 협상하거나 시 주석과 관계 개선에 나설 경우 일본이 외교적으로 소외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중동 정세도 일본의 우려를 키우는 변수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재개하면 미군 전력이 중동에 집중돼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 공백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총리관저의 한 간부는 미국이 일본에 방위비와 대미 투자 확대를 요구할 가능성에 대해 “일본에서 돈을 받아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압박을 강화하려는 것 아니겠느냐”고 우려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은 4일 “다른 나라의 내정에 관한 문제이므로 논평을 삼가겠다”면서도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타야마 사쓰키 재무상도 선거가 중요하지만 대통령과 각료가 곧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라며 양국 간 공조를 강조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번 선거를 ‘트럼프 시대가 끝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민주당의 약진을 이끈 급진 좌파 역시 자유무역과 다자간 협력에 비판적이어서 일본이 기대하는 국제질서의 복귀가 쉽지 않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유럽에서는 민주당의 승리를 트럼프 정책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4일 X에 “미국인들은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과 증오, 성차별, 기후변화 부정, 엘리트의 특권에 반대표를 던졌다”며 “브라질에서 일어난 일이 미국에서도 일어났고, 곧 스페인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와 국방비 증액·중동 전쟁 등을 놓고 충돌해 온 산체스는 오는 29일 총선을 앞두고 있다.
미국과의 통상 갈등이 재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베른트 랑게 유럽의회 무역위원장은 “‘레임덕’(다리 저는 오리)이 ‘앵그리덕’(화난 오리)으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안정성도 예측 가능성도 없다”며“그는 유럽산 의약품과 기계 제품 관세를 밀어붙여 압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일각에서는 민주당의 의회 장악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4일 “민주당 압승에도 유럽 당국자들은 미국의 대유럽 정책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관세 압박과 우크라이나 지원, 유럽 안보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가 의회 권력 교체만으로 달라지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민주당의 승리가 자국에 호재가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현지 매체 키이우인디펜던트는 4일 “민주당의 상·하원 장악이 우크라이나에 잠재적인 호재가 될 수 있다”며 “민주당이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확대와 대러시아 제재 강화에 우호적인 데다 의회 차원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러시아 정책을 견제할 여지도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 국영 RIA 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 문제를 비롯한 우리의 원칙적이고 일관된 노선은 물론 전반적인 외교정책은 단기적인 고려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며 “당연히 다른 국가들의 정치적 기류 변화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우리는 러시아연방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기존 업무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도 중간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평화 중재 노력을 이어가길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