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더랜드 (Fatherland) 나치 피해 망명 16년 만의 귀향 냉전 속 동서 진영의 정치적 압박 아들 잃은 아버지의 신념과 갈등
16년 만에 독일로 돌아온 토마스 만(한스 치슐러)과 에리카. [MUBI]
한 사람의 삶에서 정치적 진영은 어떤 의미일까. 1949년 여름, 노벨문학상 작가 토마스 만은 16년 만에 독일 땅을 밟는다. 1933년 나치를 피해 고국을 떠난 그는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고, LA 인근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망명 생활을 이어왔다.
그해는 괴테 탄생 200주년이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서쪽의 프랑크푸르트와 소련이 점령한 동쪽의 바이마르가 저마다 그에게 괴테상을 주겠다고 나섰다.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파더랜드(Fatherland)’는 이 짧은 귀향길을 따라간다. ‘이다(Ida)’, ‘콜드 워(Cold War)’에 이은 그의 역사 3부작 마지막 편으로,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는 아버지가 아닌 아들에게서 시작한다. 프랑스 칸의 호텔 방에서 클라우스(아우구스트 딜)가 누나 에리카(산드라 휠러)와 긴 통화를 한다. 에리카는 아버지의 귀국길에 함께 가자고 설득하고, 클라우스는 생각해 보겠다고 답한다.
그는 끝내 오지 않는다. 출국을 앞두고 들려온 것은 그의 사망 소식이다. 그런데도 토마스(한스 치슐러)는 일정을 접지 않는다. 배우이자 작가, 종군기자였던 에리카는 슬픔을 삼킨 채 아버지의 비서이자 통역으로 검은 뷰익의 운전대를 잡는다.
토마스 만의 딸 에리카 역의 산드라 휠러. [MUBI]
독일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운전석을 지키는 이유는 하나다. 아버지를 혼자 보낼 수 없어서다. 젊은 시절 자동차 랠리에 나섰고 나치를 풍자하는 카바레 무대를 꾸렸던 그녀는 망명 내내 아버지의 원고를 정리하고 강연을 통역했다. 이 부녀 관계는 사랑과 원망 중 어느 한쪽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같은 망명이라도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길을 걸었다. 토마스 만은 망명 초기 미국에 도착해 “내가 있는 곳이 독일”이라는 말을 남겼다. 조국을 몸 안에 지니고 다닌 사람이다. 클라우스는 그러지 못했다. 나치에 영합한 배우를 그린 소설 ‘메피스토’는 독일에서 금서가 됐고, 그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약물에 기대 살았다.
전쟁이 끝났어도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를 내쫓은 나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영화는 클라우스의 통화 장면을 길게 보여준 뒤 그를 화면에서 지워버린다. 떠나온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은 망명 그 자체보다 돌아갈 자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여정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마르로 이어진다. 서쪽에서는 환호하는 군중과 기자들이 만을 맞는다. 기자들은 그를 칭송하면서도 독일을 떠났던 일을 캐묻는다. 리셉션장에는 나치 시절을 아무렇지 않게 지운 이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 서 있고, 바그너의 후손은 바그너의 명예 회복을 거들어 달라고 청한다.
동쪽에서는 당국이 동원한 합창단이 기다리고, 새 정권은 그에게 요직을 제안한다. 서쪽은 그를 반나치 양심의 상징으로, 동쪽은 사회주의의 동반자로 내세우고 싶어 한다. 어느 쪽도 그의 말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만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려 하고, 미국 정보기관 요원은 그런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지켜본다.
옛 부헨발트 수용소가 이제 소련의 정치범 수용소로 쓰인다는 증언도 들려온다. 부헨발트가 종전 뒤 소련의 특별수용소로 쓰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나치가 물러난 자리를 또 다른 전체주의가 채우고 있다. 만은 연설마다 괴테를 빌려 예술이 정치를 넘어 갈라진 민족을 묶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연단 아래의 현실은 그의 말과 따로 움직인다.
만의 삶 자체가 진영의 의미를 묻는다. 1차 대전 때 그는 독일 민족주의를 옹호한 보수 논객이었다. 전쟁 뒤에는 공화국과 민주주의 편에 섰고, 나치에게는 조국의 배신자로 몰려 국적을 빼앗겼다. 망명지 미국에서는 냉전이 깊어지자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바이마르 방문은 그 의심에 불을 붙였고, 그는 1952년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했다. 한 사람이 평생 오른쪽과 왼쪽 모두에게 의심받은 셈이다. 그는 어느 진영에 속해서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라, 생각이 바뀔 때마다 다른 진영의 공격을 받았다.
흑백 화면과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비는 파블리코프스키 감독 전작들의 형식을 그대로 잇는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달리는 차 안에서 벌어진다. 차창 밖으로 무너진 도시가 지나가고, 부녀 사이에는 입 밖에 내지 않는 말이 쌓여 간다.
부녀가 탄 검은 뷰익이 폐허가 된 독일을 가로지른다. [MUBI]
오늘날 유럽을 대표하는 배우로 꼽히는 산드라 휠러는 대사보다 눈으로 연기한다.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경멸, 동생을 지키지 못한 자책이 한 얼굴에 겹친다. 한스 치슐러의 토마스 만은 오만하고 차갑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예정된 행사를 하나도 거르지 않는 모습은 섬뜩할 만큼 담담하다.
다만 82분 안에서 영화는 설명을 극도로 아낀다. 괴테와 독일 문학사, 전후 정치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는 대사의 무게를 따라가기 어렵다. ‘콜드 워’의 뜨거운 감정을 기대한 관객에게 이 영화의 온도는 낯설고, 토마스 만이라는 캐릭터는 마지막 장면까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클라우스가 화면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 그 상실의 크기가 늦게 전해지는 것도 아쉽다.
그런 풍경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정책을 두고 다투기보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쓴다. 이민 사회도 그 대립의 양상은 마찬가지다. 태평양 건너의 정치 뉴스는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들어온다. 선거 때마다 열기가 뜨겁다. 그러면서도 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되도록 정치 이야기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여기에 미국 정치의 대립까지 겹친다. 고국의 진영과 이 땅의 진영이 한 사람 안에서 서로 다른 줄을 긋기도 한다.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먼저 묻는 세상에서 만처럼 어느 쪽 손도 온전히 잡지 않는 사람은 설 자리가 좁다. 그의 선택은 지식인의 양심이었을까, 아니면 아들의 죽음까지 외면한 아버지의 고집이었을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진영을 고르지 않는 개인의 생각은 왜 존중받지 못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