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탕 옆에 와인잔을 놓으면 어쩐지 어색하다. 들깻가루와 고춧가루가 뒤엉킨 국물, 마늘과 후추 향이 밴 돼지 등뼈. 소주가 있어야 할 자리에 와인이 끼어들 틈이 있을까.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편의점에서 산 호주산 레드 와인 한 병이 케케묵은 선입견을 깨버렸다.
배달음식·1만원 편의점 와인의 만남 스물네 살, 어학연수를 떠났던 호주에서 인생 첫 페어링을 경험했다. 아르바이트하던 가게 사장님이 마련한 회식에서였다. 사장님이 꺼낸 와인을 떡볶이·제육볶음 등과 함께 먹었다. 그날 떡볶이 한 입, 스파클링 한 모금을 끝없이 반복했다.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와인을 만나니 음식에 자꾸 손이 갔다. 그 식사를 설명하는 단어가 ‘페어링’이라는 건 한참 뒤에 알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실습은 계속됐다. 와인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갈 때면 배낭에 와인 서너 병을 넣었다. 어느 날 감자탕을 앞에 두고 호주 레드 와인 ‘옐로테일 쉬라즈(Yellow Tail Shiraz)’를 꺼냈다. 옐로테일 쉬라즈는 편의점에서 1만원대에 파는 대표적인 저가 레드 와인이다.
양념이 듬뿍 밴 돼지 등뼈의 살점을 우물우물대다가 와인을 한 모금 흘려 넣었다. 고춧가루는 매워지고, 마늘은 달콤해지고, 후추는 화려해졌다. 고기는 안심스테이크처럼 부드러워졌다. 고기 한 점, 와인 한 모금. 나도 모르게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누가 페어링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이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사실 옐로테일 쉬라즈는 극찬할 만한 와인이 아니다. 바닐라와 후추 향은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지고, 달큰하고 씁쓸한 맛은 여운을 남기지 못하고 바로 끊긴다. 그런데 감자탕을 만나니 국물에 들러붙은 들깻가루마저 맛있게 해주는 마법을 부렸다.
첫맛 달큰, 끝맛 알싸…쉬라즈 마법
호주 바로사 벨리의 포도밭과 쉬라즈 포도(아래 사진). 바로사 벨리의 쉬라즈 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은 묵직하고 강해 감자탕처럼 양념이 센 음식과 잘 맞는다. [사진 이영지]
그 마법이 옐로테일이라는 브랜드가 아니라 쉬라즈라는 포도의 힘이라는 건 더 많은 훈련 뒤에야 알게 됐다. 쉬라즈는 당도가 높기로 유명한 포도다. 그 높은 당도를 그대로 알코올로 치환해 도수도 높다.
쉬라즈(Shiraz)는 프랑스 론(Rhone) 지역의 ‘시라(Syrah)’와 같은 포도다. 호주에서는 쉬라즈라고 한다. 같은 포도라도 땅과 기후에 따라 맛과 향이 바뀌어 이름도 달라진다.
이때 기억해둘 단어가 ‘스파이시(spicy)’다. 와인이 고추처럼 맵다는 뜻이 아니다. 후추·정향·시나몬 같은 향신료를 떠올리게 하는 향을 말한다. 와인이 처음엔 달큼했다가 끝에서 알싸해지는 느낌이 올라오면 그때 ‘스파이시하다’고 한다.
감자탕의 페어링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 쉬라즈는 감자탕의 강력한 양념들과 겨루어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맞받아친다. 그렇게 치고받다가 친구가 된다. 달큰한 과실미가 고기를 감싸고, 알싸한 향이 양념에 힘을 보탠다.
감자탕 먹는 날 호주 쉬라즈 한 병을 챙겨보자. 감자탕처럼 쉬라즈도 가격에 부담이 없다. 고기 한 점에 와인 한 모금, 자꾸 반복하게 된다면 이미 감자탕레드를 제대로 만난 것이다.
※‘위키드 와이프(Wicked Wife)’로 활동 중인 와인 페어링 전문가 이영지씨가 떡볶이·순대·치킨처럼 우리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쉽고 발랄한 문장으로 소개합니다. 중앙일보 프리미엄 구독 서비스 ‘더중앙플러스(The JoongAng Plus)’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