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씨가 향년 87세로 영면에 들었다. 그는 국민 배우, 국민 아버지라 불릴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온 분이다.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의 한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어머니의 말을 받들어 극중에서도 총과 수갑을 쓰지 않았던 최불암의 박 반장은 또 다른 어른의 표상이었다.”
그를 길러낸 어머니는 어떤 분일까. 고경숙 소설가의 단행본 ‘이 사람을 기른 어머니’에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의 일대기가 등장한다. 이 책은 작가가 ‘숙대신보’ 편집국장 재직 시 ‘여성동아’ 요청으로 당시 각계 저명인사를 길러낸 어머니들을 직접 인터뷰했던 글 모음집이다.
이명숙은 빈농의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18세 때 배우 모집 광고를 보고 서울역 앞 극단 연습실로 무작정 찾아갔다. 사람 볼 줄 알았던 감독이 그녀를 채용, 대박을 터트렸다. 공연 중 한 남성을 소개받았다. 최철이었다. 둘은 결혼하여 외동아들 불암을 낳았다. 아이가 기어 다닐 무렵 최철은 모자를 두고 상하이로 가버렸다. 그리고 최불암이 일곱 살 때 귀국, 영화 제작에 열을 올려 2년간 영화 3편을 제작한 후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남편 사후 그녀는 온갖 고초를 겪었다. 명동에 ‘은성’이라는 대폿집을 열었다. 그 술집은 김수영, 박인환, 오상순, 전혜린 등 당대 문화인들의 사랑방이었다. 현재 명동 아리따움 매장 자리. 은성주점 터에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1986년 그녀가 작고한 후 외상장부가 발견되었다. 장부에는 외상 고객 이름이 안경, 키다리, 놀부 등 자신만 알 수 있도록 기록돼 있어 그들의 명예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유족이 외상값을 받을 수도 없게 했다.
은퇴 후, 아들이 유명해져 넉넉한 형편인데도 마포 신수시장 입구에 ‘은성’이라는 신발가게를 차렸다. 신발이 남루한 사람이 지나가면 불러 새 신발을 신겨 보내기 일쑤였다. ‘고마운 할머니’로 소문났지만 그녀가 최불암의 모친인 줄은 몰랐다.
그녀는 “아들은 내 자식이지만 내 욕심을 주문하기보다 제멋대로 무엇인가 해주기를 더 바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최불암을 혹독하게 길렀다. 돈 벌러 가느라 아들을 방안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리기도 했다. 한번은 불암이 들창을 부수고 탈출, 어머니의 일터로 찾아갔건만 그녀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무언의 교육이었다.
1·4후퇴 때는 아들을 삼촌·이모와 함께 집에 남겨두고 혼자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버렸다. 나중에 이에 항의하자 어머니는 널 데려가면 삼촌과 이모도 함께 데려가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다 함께 굶어 죽는다, 나 혼자 가야 돈벌이해서 돌아올 수 있다는 냉혹한 답이었다.
최불암은 성장 후에야 어머니의 위대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수사반장 출연 때 수갑이나 권총 차지 말고 선글라스도 쓰지 말라는 어머니의 충고가 있었다. 최불암은 군말 없이 따랐다. 그게 인간미 풍기는 최불암을 만든 데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까.
어떤 분야의 1인 자가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게 지원하고 성원해 준 누군가의 힘이 있기 마련이다. 최불암 어머니 얘기를 읽으면서 우리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 이름만으로도 늘 목이 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