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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 박찬욱에 대한 이창동의 응답인가 [송원섭의 와칭]

중앙일보

2026.11.07 13:00 2026.11.0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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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6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능한 사랑'. 설경구와 전도연이 연기하는 해고 노동자 부부를 통해 현대 한국 사회의 인간과 노동 문제를 이야기한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11월6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능한 사랑'. 설경구와 전도연이 연기하는 해고 노동자 부부를 통해 현대 한국 사회의 인간과 노동 문제를 이야기한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얼마 전 끝난 부산영화제에서 잠시 박찬욱 감독을 마주쳤습니다. 몇 마디 얘기 끝에 '가능한 사랑'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봤느냐”는 질문에 저는 “감독님 작품에 대한 답장 같더군요”라고 답했습니다. 박 감독은 바로 알아듣고 “아, 재미있는 시각이네요”라고 하더군요.

박 감독은 지난해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통해 AI의 주도로 인간의 노동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미래 시대를 빼어나게 그려냈습니다. 이에 비해 ‘가능한 사랑’은 명문가 출신의 갑부 상우(조인성)의 아내 예지(조여정)가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 미옥(전도연) 부부의 사연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어 접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죠.

‘가능한 사랑’의 도입부. 한 독립영화 지원사업 심사장에서 예지가 기획 의도를 설명하자 한 심사위원이 “AI로 인해 사라지는 일자리 같은 핫한 주제를 다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합니다. 예지는 아직은 해직 노동자의 삶 같은 현재의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취지로 대답하죠. 이런 대목을 보면서 제겐 ‘가능한 사랑’이 ‘어쩔 수가 없다’에 대한 응답으로 느껴졌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11월6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가능한 사랑’의 리뷰입니다. 결말에 대한 힌트가 등장할 수도 있으니, 방해받지 않고 싶은 분은 영화를 보신 뒤에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부유한 남편을 둔 예지(조여정)은 노동현장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노동자들 사이로 뛰어든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부유한 남편을 둔 예지(조여정)은 노동현장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노동자들 사이로 뛰어든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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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가난을 탐하지 말라'

어쩌면 생계를 걱정해야 할 해직 노동자 부부와 해변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바닷가 별장을 가진 초상류층 부부. 예지는 선뜻 미옥에게 “우리 친구 하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꽤 쉽게 가까워집니다. 물론 관객이 보기엔 어딘가 아슬아슬한 관계죠. 문득 박완서의 단편 ‘도둑맞은 가난’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 아흔아홉 냥 가진 놈이 한 냥을 탐내는 성미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해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미옥이 예지를 처음 자신의 집에 들였을 때, 벽에는 괄주작침(刮柱作針)이라는 휘호가 걸려 있습니다.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기둥을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 본래는 오랜 시간에 걸친 부단한 노력을 가리키는 긍정적인 의미지만, 이 영화에선 어쩐지 ‘되지 않을 일을 억지로 되게 하려는 헛된 노력’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능한 사랑'의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제공

'가능한 사랑'의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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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들은 승리할 수 있을까

영화 후반, 바닷가에서 상우와 미옥이 벌이는 해프닝은 미옥의 작은 복수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이미 자신에게 접근하는 예지의 태도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미옥은 이 해프닝을 통해 ‘돈과 권력으로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라는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하죠.

물론 거기서 이어지는 호석과 상우의 대결 장면은 ‘그렇다고 진짜 이긴 것도 아님’을 관객에게 각인시킵니다. ‘어려서부터 싸움질만 한’ 호석이 육체적인 터프함으로는 귀공자 상우를 압도할 것 같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죠. 이 장면은 어딘가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2012)’에서 김강우와 온주완의 대결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실제로 태권도 선수 출신이었던 배우 조인성의 과거가 오버랩되면서 블랙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두 부부가 어우러진 술자리. 과연 이들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사진 넷플릭스 제공

두 부부가 어우러진 술자리. 과연 이들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사진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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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나

전도연을 비롯한 네 주인공의 연기는 모두 칭찬이 아깝지 않았지만, 제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들의 장면이 아닌 집단 심리치료 신이었습니다. 진짜 해고 노동자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고, 사연 하나하나가 구구절절 가슴을 파고들더군요.

그중 한 사람이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옛날 회사 사람들을 만날 때가 제일 무섭다”고 말합니다. ‘생존자’가 된 사람들은 해직당한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립니다. 자신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사실 호석에게서 돈을 빌려 간 뒤 호석과 인연을 끊은 호석의 형제들도, 호석이 경찰들에게 구타당하는 동안 도망친 회사 후배가 호석을 꺼리는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죠.

그렇게 상처만 남은 호석은 '연대, 투쟁, 노동자 권리' 같은 '사람을 속이는 말'들이 싫다며 울부짖습니다. “어차피 돌아설 거면서, 어차피 서로 배신할 거면서!”
설경구-전도연 부부의 아들 철이는 피해자이면서 관찰자, 그리고 미래 세대의 대변자처럼 보인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설경구-전도연 부부의 아들 철이는 피해자이면서 관찰자, 그리고 미래 세대의 대변자처럼 보인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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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라기 연맹'의 미래

그런데도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가능할까요. 과연 이 영화의 결말에 담긴 것은 비관일까요, 낙관일까요. 본래 감독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론 희망에 무게가 실린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지 덕분에 미옥은 호석의 진심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부부 사이는 다시 공고해지죠.

한편 미옥은 아들 철이가 별장 일꾼인 민식과 어울려 화단에 물을 주는 것을 보고 ‘계급의 고착화’를 연상하며 언짢아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미옥이 철이를 바라보는 시선과,철이가미옥을 바라보는 장면의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미옥이 보기에 철이는 피고용인의 ‘노동’을 하고 있지만, 철이와민식은 물안개에 맺힌 무지개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제게 이 장면은 철이와민식의 관계가 미옥이 생각하는 것에 비해 상당히 낙관적이라는 신호로 읽혔습니다. 민식은상우가 호루라기를 불면 달려오는 존재지만, 한편으론 CCTV를 통해 상우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는 감시인이기도 하죠.

저는 마지막에 철이가상우의 호루라기를 갖고 있는 것은 민식이 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식의 입장에서 보면, 철이에게 호루라기를 주는 것은 자신을 통제할 도구를 멀리 내다 버리는 것과 같죠. 이렇게 상우의 통제를 거절한 민식은 앞으로 철이와 어떤 식으로든 손을 잡고 미래를 맞이할 거라고 예상해 봅니다.
지난 9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가능한 사랑' 팀. 사진 넷플릭스 제공

지난 9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 '가능한 사랑' 팀. 사진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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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와 거장들의 악연이 끝나나

이 영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공개된 것은 국내 기존 투자사들이 이 영화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넷플릭스는 일찍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은 감독들과 즐겨 작업을 시도했죠. 봉준호 감독의 ‘옥자’,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마틴 스코세이지의 ‘아이리시맨’, 데이비드 핀처의 ‘맹크’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들은 넷플릭스와 작업한 이후, 한결같이 입을 모아 “넷플릭스가 영화 제작에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순수한 투자자의 위치를 고수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긍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극장 흥행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영화의 경우, 최종 완성 전에 상업성을 고려하는 프로듀서의 입김이 상당 부분 작용하기 마련인데, 넷플릭스의 ‘불간섭주의’ 아래서는 감독들의 ‘예술혼’을 가로막을 수단이 사실상 사라지게 됩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작품이 좀 지루하거나 난해하다는 평가를 면치 못하게 되었죠.

이런 전례들과 비교할 때, 이창동 감독이 ‘가능한 사랑’에서 보여준 완성도는 더욱 놀랍습니다. 많은 관객이 ‘3시간 순삭’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연출력은 이 감독의 역대 작품을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 아닐까 싶네요. 이미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받은 이 영화가 과연 내년 아카데미상에서는 어떤 성취를 거둘지 궁금합니다.



송원섭([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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