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 소방행정타운 내 소방혼 추모탑과 소방영웅 6인 추모비(오른쪽) 앞에서 이성촌 서울시119특수구조단 특수구조대 부대장이 묵념하고 있다. 소방혼 추모탑은 순직 소방관들의 넋을 기리는 시설이다. 오른쪽 추모비에는 2001년 홍제동 다가구주택 화재로 순직한 소방관 6명의 얼굴과 활약상이 새겨져 있다. 김경록 기자
“순직한 동료들 몫까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01년 3월 4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다가구주택 화재로 동료 소방관 6명을 가슴에 묻은 이성촌(59·사진) 서울시119특수구조단 특수구조대 부대장의 다짐이다. 홍제동 참사는 국내 단일 화재로는 가장 많은 소방관이 순직한 사고로 기록돼 있다. 당시 방화복 아닌 방수복을 입고 화재진압 현장에 뛰어든 열악한 현실과 불법주차 차량으로 진입이 어려웠단 사실이 알려졌고 이후 장비, 법령 등이 대대적으로 정비됐다. 이 부대장에게도 삶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9일 ‘소방의 날’을 앞두고 지난달 29일 그를 만났다.
이 부대장은 8년 가까이 특전사 부사관으로 복무하다 세 번 도전 끝에 1996년 소방관이 됐다. 그는 “시민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소방관이 꼭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임용 초기 노인이 하수구에 틀니를 빠뜨렸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진공청소기에 PVC 파이프를 연결해 꺼내준 적 있다. 노인의 아내가 “고맙다”며 고쟁이 주머니에서 꺼내 건넨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폐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화재 현장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1998년 이 부대장은 서울 홍은동 화재 현장에서 갑자기 살아난 불길(逆火)에 전신 35%의 큰 화상을 입었다. 동료 장석찬·박준우 소방관이 병실을 찾아 대소변까지 받아내며 정성으로 간호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홍제동 참사 때 매몰돼 순직했다. 당시 비번이었던 이 부대장은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들어갔다. 그는 “몸에 온기가 남아 있어 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비보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살아 있었다면 더 많은 생명을 구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했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들은 보육시설 봉사활동에 보태라며 월급을 쪼개줬다.
이성촌 부대장이 묵념 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록 기자
그가 참사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봉사단체 ‘사랑나눔’을 만든 이유다. 보육시설에서 시작한 봉사는 비인가 장애인 돌봄시설 등으로 확대됐다. 이 부대장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국민추천포상 대통령표창을 받은 바 있다. 지금도 해마다 쌀 1000㎏과 김치 등을 마련해 ‘이웃’에게 전한다. 그 역시 2013년 서울 마곡동 화재 현장에서 추락했다가 12층 비계에 걸려 목숨을 건졌다. 갈비뼈 6개가 부러졌다.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 했다.
이 부대장은 심한 화상 흉터에는 소방관 모습과 ‘First In, Last Out’(가장 먼저 들어가 마지막에 나온다)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내년 말 정년퇴직을 앞둔 그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화재 현장에 고립된 소방관을 구조하는 일이다. 후배들에게 고립 상황 탈출법도 가르친다. 동료 소방관의 안타까운 순직 소식이 더는 전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는 “내 후배들만큼은 나 같은 아픔을 겪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강남 구룡마을 화재 때도 만일을 대비해 출동했다.
이성촌 부대장이 과거 화상을 입었던 어깨 부위에는 소방관 모습과 '가장 먼저 들어가 마지막에 나온다'(First In, Last Out) 문구가 새겨져 있다. 김민욱 기자
다만 25년이 흘렀지만 홍제동 사고 현장은 여전히 찾지 못한다. 2년 전 조성된 ‘소방영웅길’에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대신 순직 동료들의 유가족과 명절마다 안부를 주고받고 경조사를 챙기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 소방행정타운 내 ‘6인의 소방영웅’을 새긴 추모비와 탑을 찾기도 한다.
이 부대장은 최근 논란이 된 소방 예산 관련 추미애 경기도지사의 ‘재정 빨대’ 발언에 대해서는 “경기도 살림을 꾸리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표현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목숨을 걸고 일하는 소방관들로서는 이런 말까지 들어가며 일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면서도 “그건 그분들의 몫이고 우리는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