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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역사를 바꾼 30대 사건] 예루살렘의 함락 (A.D.70년)

그리스도 박해자들에 대한 심판, 기독교중심지 지중해로 이동 계기

 초대교회 시절 지중해 연안의 정치·군사적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로마 권력자들에게 기독교는 단지 유대 종교의 한 작은 분파에 불과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유대인들의 전통종교에서 출발했으며 초대교회 사도들 대부분이 이러한 유대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경전은 히브리 성서였기 때문이다.

 초대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팔레스틴이라는 지역적 제한과 유대교와의 직접적인 종교적 연관성은 기원후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의 함락에 의해 깨어지기 시작했다. 사도 시대 기독교의 총 본산이었던 예루살렘이 막강한 로마 군대에 함락됨으로써,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팔레스틴 지역의 유대전통에만 얽매일 수 없게 되었다.

 예루살렘 함락과 더불어 기독교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향한 그 첫번째 순례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중해연안은 더 이상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는 유대전통이 지배하는 땅이 아니었다. 보다 광범위한 다신교적 이방종교의 전통과 고도로 발달된 헬라문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새로운 종교적 공용어는 헬라어가 됐다. 그들이 확립해야할 신학 체계도 마땅히 헬라철학의 터전 위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모세의 율법과 다윗 왕조의 전통에 익숙한 그들에게 플라톤의 철학은 대단한 사상적 도전이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직접적으로 초래한 사건이 바로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함락이었다. 예루살렘은 초기 기독교 사도 시대 동안 기독교 운동의 총 본산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사도중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적 권위(Apostolic Authority)의 상징이었다. (사도행전 15장)

 기원후 66년경, 로마의 압제와 혹심한 세금수탈에 저항하는 유대인의 궐기가 가이사랴에서 시작됐다. 특별히 무리한 세금포탈과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 강요는 유대인들의 무력 저항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 박해자로 유명한 네로 황제의 특명을 받은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의 군대는 먼저 지중해 동부연안의 항구도시를 전략적으로 점거한 다음 예루살렘을 향해 동진했다. 그러나 베스파시안 장군이 네로 황제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로 등극함에 따라 (69 - 79년 로마제국 통치) 그는 자신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예루살렘 점령의 임무를 맡겼다.

 주후(A.D.) 70년 4월부터 시작된 로마군대의 예루살렘 공격은 그 해 9월까지 계속됐다. 유대종교의 총본산이자 막 종교적 태동을 시작한 기독교의 새 보금자리 예루살렘은 다시 이방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로 흩어졌다. 초대 교회사를 남긴 유세비우스(Eusebius, c. 260 - 339)는 이 사건의 전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네로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지 13년째 되던 해, 베스파시안 장군은 유대지역 정벌중 수하의 군사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그의 군사작전은 아들 티투스에게 일임되었다. 구주의 승천 이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음흉한 음모를 계속했으며 사도들에게도 그들의 죄를 계속 저질렀다.그들은 먼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으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목잘라 죽였다. 나머지 사도들은 유대지방에서 축출당했다. 그러나 그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그 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방방곡곡으로 흩어졌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이미 계시된 말씀의 교훈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페라에아(Peraea)에 위치한 펠라(Pella)에 정착하게 되었다. 성스러운 사람들이 유대인의 수도와 유대땅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범죄하였던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마침내 이루어졌고 그들 중의 사악한 세대는 참혹한 결과를 맛보아야만 했다.”

 로마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붕괴되고 말았다. 바벨론의 공격으로 주전(BC) 586년에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유대교는 성전 중심에서 회당 중심의 종교체제로 급속히 재편됐다. 예루살렘의 함락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열심당원들은 마사다를 최후의 거점으로 3년간 투쟁을 지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웅적인 저항은 결국 집단 자결로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예루살렘 함락은 엄청난 역사·종교적 결과를 초래했다. 특별히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로 주 활동무대를 옮김으로써 유대교의 전통과 결별을 시작한다. 예루살렘 함락으로 시작된 기독교 중심부의 이동은 결국 로마라는 새로운 기독교 중심지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로마를 중심도시로 하는 서방기독교(Western Christendom)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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