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의지할 수 없는 이 겨레 어린이들아, 눈물을 함빡 내게로 넘겨다오. 너희를 대신하여 울어주마.”
일제 민족의 암흑기에 이 나라 어린이들에게 횃불을 쥐어 준 소년문화 운동의 선구자 방정환. 그는 방씨 가문이 낳은 큰 별이자 그의 이름처럼 사라질 수 없는 ‘어린이’라는 낱말과 함께 이 민족의 정신 속에 항상 살아 숨쉬는 혼이다. 짧은 인생 역정 속에 시대를 앞서 걸으며 봉건구조의 가족관계에 억눌려 있던 여성과 어린이를 해방시킨 사상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이기도 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중략).”
일제 시대의 암흑상을 암시적으로 표현, 당시 우리네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던 눈물겨운 이 동요는 그의 민족사상을 대표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10세 때 이미 동네 친구들과 ‘소년입지회’를 조직했을 만큼 일찍 깬 소년이었던 그는 19세에 천도교주 손병희의 사위가 됐다.
손병희는 “옆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며 사람 가리는 법으로 써 왔다는데, 소파의 욕심없고 원만한 옆얼굴을 감정(?)하고는 두말없이 세째 딸 용화를 맡겼다고 한다.
소파는 서울토박이로 서울 한복판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1899년 11월 9일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는 방경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보전에서 공부하다 3·1운동이 나자 ‘독립신문’이란 제호로 지하신문을 등사 발간, 빨래 광주리에 숨겨 전하다 발각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해 늦게 일본 동경에 유학, 그 곳에서 우리 나라 어린이 운동의 횃불을 켜들게 된다. 윤극영 등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우리 나라 유학생들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어린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그때까지 어른의 종속물로만 여겨진 어린이들을 처음으로 독립된 인격으로 대접하고, 사랑하고, 보호할 것을 주창하는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어린이’란 말이 그에 의해 처음 쓰여졌고 ‘어린이날’도 그때 ‘색동회’에 의해 제정됐다.
1923년 5월 1일은 서울에서 첫 어린이날이 마련된 날.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어린이에게는 앞날의 주인공임을 강조해주는 뜻깊은 명절로 그때 소파는 ‘어린이날 노래’를 짓기도 했다.
육당 최남선은 1908년에 나온 ‘소년’ 잡지 머리말에서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고 외쳤으며, 춘원 이광수는 10년 뒤인 1918년에 ‘청춘’ 잡지에 ‘자녀중심론’을 폈다. 그러나 이들은 구호에 그쳤을 뿐 어린이 속에 파고들어 이를 실천한 사람은 바로 소파였다는 것이 사가들의 견해다.
뚱뚱보 선생으로 통하던 소파, 그러나 그는 말라깽이 흉내도 잘 내던 동화구연의 대가였다. 목소리가 굵고 거칠었던 소파, 그러나 시골아가씨 흉내도 잘 내던 이야기의 명수로 세계 어느 나라의 딱딱한 이야기라도 소파 손을 한번 거치면, 충청도나 경상도 어느 시골냄새가 풍기는 구수한 이야기로 변하여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귀국해서도 어린이를 위한 도서출판·계몽강연 등 어린이 운동에 정열을 쏟았던 그는 급환으로 32세를 일기로 이승을 떠났으나 그의 어린이 사랑과 실천은 ‘선각’의 빛을 갈수록 더한다.
방씨의 시조는 신라시대 당나라 문화사절로 왔다가 귀화한 방지. 중국 하남 사람인 그는 신라 문무왕 9년(서기 669년) 당나라 한림학사로서 당 고종의 문화사절이 되어 신라에 왔다.
당시 신라는 북쪽의 고구려 및 백제와 빈번하게 충돌, 친당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화를 수입하기에 열을 올렸고 이것이 이 땅에 방씨를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신라에 들어온 그는 설총과 더불어 동방유학과 예교의 진흥에 힘써 오다 이 땅에서 결혼하여 정착, 한국인이 됐다. 그의 선대, 그러니까 방씨의 원시조는 중국 신화시대의 제왕으로 전하는 염제신농씨의 12세손 뢰.
그가 하남의 방산을 봉토로 받아 이를 연유로 방씨 성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신라에 온 방지는 뢰의 1백30세손인 군강의 차남이라고 방씨의 족보는 적고 있다. 온양 외에 상주·신창·군위로 본관을 따로 쓰기도 했으나 근래 모두 온양으로 합본했다. 어쩌다 아직 합본하지 않은 군위 방씨가 눈에 띄지만 모두 한 시조의 후예다.
중시조 방운은 상주 출신.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2차 후백제 정벌에서 공을 세워 고려 광종 때 상서좌복사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만년의 그를 지금의 온양(당시의 지명은 온수)의 과안산에 살게 하고는 온수군으로 봉하고 이 산의 이름을 배방산이라 고쳐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방씨는 온양을 세거지로 삼았다. 도시조 방지의 아들인 방헌주 이후 관향으로 삼아 온 상주를 버리고 온양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방운 이후 후손들은 선대의 후광에 힘입어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길에 해질 날이 없었던 명문으로 등장한다.
무예에도 뛰어나 온수군의 손자 방휴는 고려 현종 9년(서기1018년)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강감찬 장군과 함께 귀주대첩의 명장으로 기록됐고 공민왕 10년(서기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1등공신으로 올랐던 방절 등 숱한 맹장들이 나왔다.
또 숙종 때 문하성 평장사와 문하시랑에 올랐던 6세손 방유와 희종 때 상서령과 상서랑성찬성을 지냈던 11세손 방만두 등은 명재상으로 당대를 휘어잡던 인물들이었다.
방씨는 당시 중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13세손 방신우는 충렬왕 때 원나라에 들어가 그 곳에서 평장사등 요직을 지내고 그 후 충선∼충숙왕대에 걸쳐 원나라를 왕래하며 대원외교에 공헌한 외교가 이기도 했다.
그의 아우 방신제도 충렬왕 때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금자광대부평장사라는 큰 벼슬을 재냈고 그곳에서 다시 귀화, 오늘까지 그의 후손들이 번성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조선조 초기 여조의 영화 속에 가문의 번성을 이룩해 온 방씨 가는 이성계 혁명의 추종을 거부하고 한때 화를 입기도 한다.
절신이었던 방순은 공민왕 때 판전교사사를 지낸 인물로 이조가 들어서면서 이태조가 예조참의의 벼슬자리를 남겨두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켰다.
15세손 방유정 역시 이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이태조는 고려 광종이 방씨 가에 내린 온양의 사비지(나라에서 내려준 땅)를 몰수하는 한편 방씨일문의 혼이 담긴 배방산을 방씨 배척의 의미로 배방산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배방산은 숙종에 이르러 방(方)자위에 초두 부수를 붙여 배방(排芳)으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조에서 방씨 가문은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으나 조선에서 최초로 문과에 급제한 17세손 방강을 비롯해 18세손 방련 등 초기 급제자들이 유배를 당하는 등 빛을 보지 못해 큰 벼슬길에 오른 인물은 흔치 않았다.
그중 두드러진 인물은 방유령. 일세의 대유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 20년 과거에 급제, 대사간과 대사헌에까지 올랐다. 외교에도 수완이 있어 명에 사절로 다녀오는 등 공적을 세웠다.
무장으로는 정조∼순조 때의 방우정이 있다. 홍경래란 때 정주성을 함락시킨 선봉장이며 그가 홍경래란의 평정에 참가했을 때 쓴 ‘서정일기’는 그 방면의 귀중한 연구자료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