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좌석 앞 스크린에 나일 강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이제 진정한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하면 나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하나는 큰 눈에 피골이 상접한 어린아이를 안은 검은 여인의 사진 위로 배우 안성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장면이다. “한 달에 3만원(약 27달러)이면 꺼져가는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아프리카의 한 시인이 쓴, 시가 아닌 절규의 두 줄이다. “그들이 성경책을 들고 왔을 때 우리는 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는 성경책을 들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의 땅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슈바이쳐 박사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가.
짧은 시간, 그리고 관광 지역만 돌겠지만 나는 이벙 여행에서도 버릴 수 없는 버릇처럼 아직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성경책을 들고 있는지, 읽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비행기 안에서는 운이 좋았다. 처음 워싱턴에서 벨기에로 가는 비행기 옆좌석에는 아리따운 젊은 흑인 여자가 앉았다.
나는 늘 흑인 미인은 시바 여왕의 후손으로 나오미 캠벨 같은 미녀를 배출한 에티오피아 여인으로 단정해왔는데 그 여자는 시에라 리온 출신이었다.
뉴욕 버펄로 대학에서 국제 교류학을 전공하고 있고, 세계 기구에서 아프리카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한다. 밝은 아프리카를 위해서 말이다.
두번째 브뤼셀에서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는 약 30~40대의 스위스 남자를 만났다. 자기는 스위스 NGO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언론이 아프리카의 비극을 너무 과장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사하라 사막 남쪽 접경에 때로 극심한 가뭄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때 생존을 위한 부족 간에 살육전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아프리카 전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봉사하는 르완다의 작은 마을은 참으로 평화스럽고 밝은 미래가 보인다며 먼저 근무했던 방글라데시에 더 많은 관심과 구호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세번째는 키갈리에서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로 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열네 살 정도의 백인 소녀다. 저녁 스낵으로 치즈 빵과 음료수가 제공됐는데 장시간 비행이라 식욕이 없어 주춤했더니 그 빵 자기에게 줄 수 없냐고 물어왔다. 소녀는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의 고등학생인데 여름 방학 봉사 활동으로 르완다 작은 도시의 유치원에서 영어와 음악, 춤 등 공동생활을 가르쳤다고 재잘거렸다.
아프리카 도착을 앞두고 유니세프의 모금 TV 광고처럼 그리 비참한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책이라는 물질보다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희망의 아프리카 사람들, 그리고 여행 중 더 밝은 그들과 만나야겠다는 기대감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장장 집에서 20시간이 걸린 긴 여정이었다.
도착 다음날 우리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라는 자서전적 소설의 주인공 카렌 브릭슨이 살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 언덕에서 나이로비를 내려다보니 고층 빌딩이 즐비한 현대 도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도 요하네스부르그 다음으로 크다는 흑인촌 슬럼가(slum)가 나왔다. 한국전쟁시 판잣집보다도 더 못한 것 같았다.
카렌의 집은 미국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층집이었다. 앞 정원이나 뒤쪽 수풀이 보기 좋아 보였다. 그리고 집 안에는 본인, 헤어진 남편, 연인의 사진과 본인이 그린 인물화, 생활 소품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도 그랬지만 그 소설의 내용이란 아주 단순한 것이다.
덴마크 출신의 여주인공이 스웨덴 남작과 이곳 커피 농장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서로에게 애정은 없었고, 남편은 사냥으로 집을 비우며 세월을 보낸다. 여주인공은 여기에 끼어든 사냥꾼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연인은 비행기 사고로 죽고 커피 농장은 화재로 망하고 그래서 아프리카를 떠난다는 줄거리다.
그런데 어찌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 여러 부분 아카데미 상을 받고 공전의 히트를 했을까. 작품성, 아니면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브포드의 명연기? 아마 그것보다는 태고로의 향수를 풍경화로는 담을 수 없는 장엄한 스크린에서 보여준 것, 넓은 초원 위에서 뛰노는 동물들, 태고의 소리를 재현하는 모차르트 작곡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이 깔렸었기 때문일 것이다.
천막 지붕에 무대가 있는 야외에서 타조, 악어 고기까지 포함된 십여 가지의 야생 고기 바비큐를 저녁으로 먹었다. 큰 호텔이었는데 한국의 카지노 대부 전 모씨가 20년 전 케냐 초대 대통령과 친분으로 차린 호텔이라 했다. 참 한국인들 대단한 것 같다.
식사 후 펼쳐진 아프리카 민속춤. 러시아 발레가 신이 인간에게 준 몸동작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했다면 이들의 춤은 원시적인 생존, 욕정의 원색적 표현 정도가 아니라 폭발인 듯했다. 비록 서구 현대 무용가가 안무를 한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