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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 사건] 6. 이슬람의 팽창 (7세기)

Washington DC

2003.02.1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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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문명 위협…봉건제 태동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과 이슬람 국가들간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고 있다. 지금 당장 전쟁으로 비화될 것만 같은 미국-이라크간의 긴장관계도 예사롭지 않다.

 십자군과 지하드(Jihad)로 상징되는 서방세계와 중동 국가들간의 분쟁의 원류를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7세기 이슬람세력의 급격한 팽창이 기원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638년, 이슬람 군대가 기독교와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에 이슬람의 사원을 건축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철천지 원수의 관계를 맺고 말았다.

 이슬람역사는 7세기 초반 시작됐다. 당시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절대적 믿음의 표현으로 주장하던 메카(Mecca)의 지도자 무하마드(Muhammad)가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유일신 알라의 선지자가 됨으로써 이슬람은 시작됐다(610년).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소명장면을 연상시키는 무하마드의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 이슬람의 경전 코란(Koran)은 완성됐다(610-632).

 무하마드는 메카를 향해 “오직 신(神)은 알라뿐이다”라는 유일신 신앙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무하마드의 이슬람신앙은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 창궐하던 다신론(多神論)적인 종교 분위기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었다. 그는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의 근원을 아브라함에서 찾았다(코란 3: 68). 무하마드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유일신 사상을 감지했던 진정한 무슬림의 시조였다.

 아브라함의 유일신 사상은 모세,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예수 등에 의해 후대로 전해졌다는 것이 이슬람의 설명이다. 무하마드의 때에 이르러 다신교의 오류와 종교적 타락은 극에 달했다. 이때 무하마드는 절대 유일신 알라로부터 유일신 종교 최후의 선지자로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무하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을 당시,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의 상업·문화의 중심지였다. 당시 메카의 부족들은 각기 토속신앙을 숭배하고 있었고 메카에는 각 부족들이 섬기는 360개의 신상을 모아 둔 신전(Ka'ba)이 있었다. 이러한 메카의 다신교적인 분위기와 상업화로 치달으며 점점 타락해가는 사회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무하마드는 이슬람이라는 절대 유일신 신앙으로의 회복을 선포했다. 원래 ‘이슬람’은 ‘항복한다’ 혹은 ‘복종한다’는 뜻이다. 절대 유일신 알라에 대한 복종, 그것이 바로 이슬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무하마드는 메카에서 토착유지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딛혔다. 결국 무하마드와 그를 따르는 200명의 초기 이슬람 교도들은 새 종교에 우호적인 도시 메디나로 옮겨간다(622년). 메디나에서 종교적인 힘을 키운 무하마드는 특유의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 무력을 사용하여 630년 마침내 메카를 점령했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아라비아의 지도자로 부상함과 동시에, 이슬람의 새로운 종교적 출발을 기약하게 됐다.

 무하마드와 그의 뒤를 이은 칼리프(Caliph)들에 의해 이슬람 세력이 동부 지중해 연안으로 팽창해 나갈 무렵, 페르시아 지역은 사산니드 왕조가, 그리고 서방세계는 로마 비잔틴 제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비록 무하마드는 632년에 운명했지만, 이슬람 세력은 계속해서 팽창해 나가면서, 페르시아와 로마 비잔틴 제국을 위협했다. 마침내, 638년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군대에게 함락됐다. 이 사건은 후대의 십자군 운동의 한 역사적 배경을 이루게 된다.

 이슬람 세력이 계속 팽창, 유럽남부와 아프리카 북부를 침공하면서 7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국제 질서는 극도의 혼미상태로 접어들었다. 유럽세계에 치명적 타격을 입힌 사건은 710년 무슬림의 스페인 상륙이었다. 아프리카 북부지방을 모두 차지한 이슬람의 군대가 모로코를 지나 이베리아 반도까지 침공해 들어감으로써, 유럽 영토의 일부가 이슬람에 편입되었다.

 7세기에 시작된 이슬람의 팽창은 유럽국가들에 심각한 사회·경제적 영향을 미쳤다. 낙타를 사막의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아랍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팽창으로 이러한 유럽-아시아 간의 중계무역이 중단되자 그동안 인도와 말레이지아, 그리고 중국에서까지 들어오던 값비싼 향료와 각종 진귀한 아시아산 물품의 유입이 중단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유럽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지배계급은 이런 경제적인 변화때문에, 지방 영주들에게 현금이나 보석이 아니라 일정한 영토를 충성의 댓가로 지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땅의 분배는 결국 유럽의 봉건제도(Feudalism)를 잉태시켰다. 봉건제를 향한 유럽사회의 이러한 변동은 훗날 십자군 운동의 사회적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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