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덜 띄어 그렇지 요즘처럼 풍요로운 세상에 예전보다 더 고아들이 많다고 하면 믿을까? 하기야 부모가 죽었거나 본래부터 없어서가 아니라 둘 다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생으로 찢겨 나가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흘러 떨어져 멍들고 비뚤어진 아이들이 많으니 천애 고아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겠다. 법이 강제로 챙겨 주고 각종 구호 기관과 사회적인 온정이 때를 봐 가며 베풀고 보살핀다지만 아무렴은 가난하고 힘에 부칠지언정 낳고 기르는 제 어미 아비의 함께하는 손길만 하겠는가.
이 세상이 요순시대가 아니고 극락정토가 아닌 이상 예나 이제나 비극과 고통은 흔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앞서 가는 근대 국가에서는 각종 사회보장제도와 복지정책이 뒤를 받쳐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준다. 그리고 제도가 빠뜨리는 틈새를 각종 사회단체나 개인들이 온정으로 메우는데 그 중에서도 종교인과 종교 단체들의 역할이 크다. 그런데 다 같은 종교이면서도 불교는 왜 이런 활동에 있어서 타종교에 비해 크기와 활력이 크게 떨어져 있는가? 특히 우리 고국과 미주의 동포 사회에서 말이다.
우리가 자랄 때는 구호활동이나 구호품이라면 으레 교회나 성당에서 하는 것으로 알았다. 때로 학교에서 저 멀리 바다 건너 미국이라는 나라로부터 보내왔다는 옷가지를 얻어 입고 우유가루를 타 오거나 칼로 자른 옥수수 찐빵을 얻어먹고 때맞춰 예방주사를 맞아 목숨을 건졌지만 이 모두가 그 나라 사람들이 믿는다는 기독교와 당연히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줄로 여기고 있었다. 정말이지 불교에서는 연필 한 자루 얻어 쓴 적이 없다. 어쩌다 할머니 따라 절에 가서 절밥을 얻어먹은 아이는 있겠지만. 그런데 그대는 은혜는 어디서 입고 무슨 바람이 불어 이 미국 땅에서까지 엉뚱하게 지금 부처님 말씀을 옮기고 있나?
정말이지 그동안 입은 온정들에 대해서는 참으로 고맙고 더 보탤 말이 없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우리 된 구실을 해서 우리 것도 좀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자비로서 말이다. 네가 나를 도와 살린 것이 너 되기 위함이 아니라 나로서 제대로 살게 함이었다면 물질도 정신도 다 내가 가진 것, 우리 것으로 되갚아야 할 빚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게 단지 새삼스런 흉내 내기가 아니라 제 나름의 진정어린 보편적인 생각의 길이요 몸짓이라면 같은 뿌리에 예전이라고 왜 같은 싹이 돋아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되짚어 보니 과연 생각했던 대로다. 한국 불교는 1600년 동안이나 널리 꾸준히 구호활동을 해 온 것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크고 작은 절이며 암자는 강보에 싸여 문간에 놓인 아기를 안아 들이고 기근의 막다른 골목에서 떠맡겨진 아이를 가르치고 먹여 살려낸 간판 없는 고아원이었다. 잘못된 제도와 문화의 틈에 끼어 오갈 데 없는 아녀자를 거두어 준 숨구멍이요 둘도 없는 부녀센터였다. 불자여, 이러한 자비 행의 전통을 아직은 시대에 걸맞게 제대로 다시 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