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르익었다. 다른 해와 비교해 볼 때, 올 해는 가을을 만끽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감성을 갖게 한다. 누구나 바쁜 일상중에 진한 커피보다도 더 진한 가을 향기때문에 심호흡하며 하늘도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시나브로 온 몸을 감싸는 가을 기운에 낙엽이 떨어지듯 반가운 몸서리도 치고 눈가에 맺힌 시린 눈물도 훔쳐 보았을 것이다. 다가올 차가운 겨울동안 내면의 성장을 위해 떨쳐낸 나뭇잎도 한 두장 즈음 주워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그 변화의 일부인 것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자칫, 떨어진 나뭇잎을 보며 그 변화의 중심에서 지난 날과 지금 가진 것을 잃어버릴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경험도 했을 것이다. 현상은 그렇다.
그러나 실상은 모질고 거친 날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땅 속 깊이 깊은 뿌리만으로 자신을 지키며 꾸준히 성장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 눈에 두드러지게 성장이 보이지 않아도 나무는 계속 자라는 것이다. 바이올린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재료가 된 나무는 그 당시 곧 1625년부터 1720여 년경 이상 기후현상으로 나무의 성장이 가장 느렸던 때에 태어났다. 이상 기후 탓으로 나무의 나이테는 아주 촘촘하게 형성되었고 밀도가 높은 재목이 되었다. 그 결과 강하고 밀도가 높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현상과 본질은 분명 다르게 이해된다.
'하늘이 높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하늘에 구름이 전혀 없어 파란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높고 넓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만약 같은 하늘임에도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금방이라도 한줄기 소나기를 퍼부울 기세라면 청명한 가을 하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늘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철저하게 현상을 주목하고 현상에 반응하는 태도이다. 피카소는 “나는 사물을 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라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그 현상 배후에 있는 본질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람은 오직 마음으로만 올바로 볼 수 있어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고 생땍쥐베리는 어린왕자의 입을 빌려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상실’은 곧 ‘얻음’이고 여전히 우리의 ‘고난’은 ‘영광’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파란 것의 본질은 대기권의 먼지로 인한 빛의 산란현상의 결과이고 빛의 본질은 ‘없슴’이 아닌가. 그러나 그 ‘없음’의 다른 면은 ‘있음’이고 ‘생명’이다. 그래서 여전히 다른 계절보다 더 파란 하늘아래서 우리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노래했던 서정주 시인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떨어지는 낙엽을 아쉬워한다. 현상적 상실을 두려워한다. 현상적 풍성함에 집착하여 그보다 더 깊은 세계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자연이 계절을 따라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본질을 잊지 말라는 무언의 몸부림이다. 단풍이 시들해졌다는 말도 들리지만 가까운 산행이라도 해야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