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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를 바꾼 30대사건]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 (800)

중부유럽 중심 중세기독교 개막

 800년 12월 25일,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된 샤를마뉴(Charlemagne)의 로마 황제 대관식은 중세기로 접어든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교황 레오 3세의 주도하에 프랑크 왕국의 통치자가 로마 제국의 황제로 취임했다는 사실은 이탈리아와 로마를 중심으로 하던 지중해 기독교시대가 마감되고, 독일과 프랑스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중부 유럽의 중세 기독교 시대가 개막된 것을 의미한다.

 샤를마뉴의 생애는 에인하트(Einhard)가 829년에서 836사이에 쓴 ‘샤를마뉴의 생애(Vita Caroli)’와 익명의 세인트 골의 수도사(Monk of Saint Gall)가 883년 혹은 884년에 쓴 ‘샤를마뉴(De Carolo Magno)’라는 두 권의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샤를마뉴는 742년경 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피핀(Pepin the Short)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교황 스데반 2세는 754년 직접 피핀을 찾아와 황제의 관을 그 머리에 씌워 줌으로써 그의 통치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카롤링거(Carolingian) 왕조시대를 열어주었다. 새로운 왕국의 통치자로 교황의 인정을 받은 피핀은 768년 운명하기 전, 자신의 제국을 양분하여 첫째 아들인 사를마뉴와 둘째 아들인 칼로만(Carloman)에게 공평하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사를마뉴가 지칠줄 모르는 정력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혀가는 외형적인 성격의 지도자였다면, 칼로만은 이와 반대로 유약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들의 성격 차이와 정치적 갈등은 결국 샤를마뉴의 군사적 승리로 종결되고(771년) 양분되었던 제국은 다시 샤를마뉴에 의해 통합되었다.

 샤를마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알프스 산맥 아래, 즉 지금의 이탈리아 북부지방을 통치하던 롱고바드(Longobard) 왕국도 정복하고(774년), 772년부터 피비린내 나는 삭슨 왕국(The Saxon Kingdom)과의 치열한 영토싸움을 계속했다.

 804년에 마침내 삭슨왕국도 굴복시킴으로써, 샤를마뉴는 유럽영토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거대한 프랑크 왕국을 이루었다. 이런 정복의 과정에서 샤를마뉴는 언제나 자신을 신실한 기독교 제국의 통치자로 여겼다. 샤를마뉴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을 받게 된 경위에 대해서 에인하트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로마에서 반란이 일어나 교황 레오를 공격하여 그의 눈를 뽑고 혀를 잘라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래서 레오는 샤를마뉴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를마뉴는 곤경에 처한 교회를 구하기 위하여 로마로 달려갔고 한 겨울 내내 그 곳에 머물렀다. 이 때 샤를마뉴가 황제의 칭호와 제국의 통치자라는 타이틀을 받게 된 것이다.”

 곡절 끝에 거행된 800년 로마에서의 황제 대관식을 기점으로 로마 제국의 기독교는 프랑크 왕국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됐다. 지금의 영국 지역과 스페인의 일부 이슬람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영토가 강력한 기독교 황제에 의해 통치됨으로써, 샤를마뉴의 무력에 의존한 유럽 변두리지방의 급속한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특별히 끝까지 샤를마뉴에게 저항했던 삭슨지역의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거나 아니면 죽음의 형벌이라는 두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자신을 기독교 제국의 황제라고 생각하던 샤를마뉴는 교회의 제도와 신학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 초기의 엄격했던 수도규범이 느슨해지고, 권력과 결탁한 정치적인 수도원장들의 부정과 축재가 계속되자 샤를마뉴는 수도원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운동에 착수하기도 했다.

 샤를마뉴시대에 가장 심각했던 교회와 신학의 문제는 동서 기독교간의 성령론을 둘러싼 소위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이었다(809년). 동서방 기독교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채택한 니캐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삼위일체(Trinity)를 바탕으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성부·성자·성령이 본질상 동일하다는 삼위일체 교리중, 특별히 성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샤를마뉴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삼위일체를 고백할 때,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 부터”(From the Father and the Son)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성령이 “성자로부터”(And from the Son: Filioque)왔다는 표현을 쓰면서, 동방 기독교의 고백인 “성자를 통해서 성부에서”(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라는 성령에 대한 표현이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샤를마뉴의 신학적 개입은 서유럽·라틴·프랑크·서방교회와 동유럽·헬라·비잔틴·동방교회간의 분열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필리오케 논쟁 이후, 동서방 교회는 문구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필요 없는 잡음을 방지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조를 채택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오늘날 널리 사용하는 ‘사도신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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