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4'에는 사투리가 천지 삐까리다. 천지 삐까리는 정말 많다는 뜻의 경상도 방언인데 요새 서울 사람들도 이 정도는 금방 알아들을 것 같다. 최근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응답하라 1994'를 봤으면 말이다.
경남 김해의 우리집에서도 이 드라마 인기가 최고로 치솟고 있다. 우리 집 아이들이 티브이 앞에서 포복절도를 하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거실로 나와 보니 이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꼬마 같은 여학생이 덩치 큰 남학생의 목을 조르며 여수 말로 욕설을 퍼붓는 장면이었다. 당하는 남학생은 삼천포 출신이란다. 같은 하숙집에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 학생들이 모여서 펼치는 사투리 대결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신촌 하숙집에서 서울말을 쓰는 칠봉이의 존재감은 필연 약할 수밖에 없다. 칠봉이처럼 나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외가의 전라도 사투리를 들으면서 자라났다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한 동아리에 들어가 보니 '응답하라 1994'처럼 전국에서 모인 사투리들이 경연대회를 하고 있었다.
팔도의 청춘들이 각지의 말을 천지 삐까리로 아니 허벌나게 늘어놓는데 나의 서울말이나 어설픈 전라도 사투리는 힘을 쓰지 못했다. 특히 억양이 강한 경상도 사투리 앞에서는 항상 완패였다. 이때 나와 같은 서울내기들이 쓰는 비장의 카드는 표준어를 들먹이는 일이었다. 쉽게 말하면 지성인인 대학생들이 표준어도 모르고 교양도 없다면서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잘 알겠지만 표준어 규정의 1항은 이렇게 시작한다.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서울말을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이 한마디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서울말을 두루 쓰면 교양 있는 사람들이요 지방 사투리를 쓰면 교양 없는 사람들이란 편견을 만들었다.
교양 앞에서는 그 억센 억양의 삼천포 말도 조폭들도 놀라게 하는 여수 욕설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교양 없는 촌놈이 되지 않기 위해 표준어 사용과 언어 교정에 열정을 바친 결과 서울 사람이 된 사투리들도 늘어났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아따' 혹은 '보소'에 가슴을 쓸어내릴 때도 있었지만.
쓰면 되는 표준어와 쓰면 안 되는 비표준어의 대립은 고정관념이나 억압을 가져왔다. 1990년대까지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조폭이나 달동네 서민들은 대개 전라도 사투리를 많이 썼다. 전라도 사투리는 서울의 변두리나 어두운 세계를 상상하는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뉴스와 시사 방송의 아나운서들은 반드시 표준어로 말해야 했다. 억양이 거센 경상도 사람들은 방송인이 되기 위해 언어 치료부터 받아야 했다. 아나운서들뿐만이 아니었다. 교양 프로그램에서 경상도 사투리로 강의를 했다가 중도 하차했다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알게 모르게 표준어로 인해 억압을 당한 사투리들은 '응답하라 1994'를 보면서 통쾌하게 웃을지 모른다. 욕에 가까운 사투리를 방송에서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한가.
'응답하라 1994'의 유행은 사투리에 응답하라는 사회적 목소리다. 우리나라 백년대계를 잘못 세운 정책을 꼽으라면 하나가 인구정책이요 둘이 표준어 정책이다. 표준어 정책은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 형태로서 말보다는 철저히 글 중심의 언어 정책이었다. 이로 인하여 수천 년간 이어져 왔던 사투리들이 사라졌다. 서울경기 지역의 방언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투리가 소멸되면서 그에 담겨 있던 귀중한 고어와 옛 문화 그리고 얼까지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얼마 전부터 사투리의 소멸이 심각해지자 지역의 방언을 보존하고 장려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었다. 대표적인 것이 제주도 사투리다. 유네스코는 제주도 말을 소멸 직전의 언어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멸 직전에 처한 것이 어디 제주도 말뿐이던가. 팔도의 방언이 다 마찬가지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소멸 직전의 방언부터 채록해 보자. 또 지역의 뉴스 방송에서는 표준어라는 구속을 벗어던지고 사투리를 한번 허벌나게 아니 천지 삐까리로 써보자. 애써 노력해 본다면 소멸 직전의 사투리인들 응답해 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