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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 <24> 창녕(昌寧) 조(曹)씨

New York

2003.03.0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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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 정상에 3개의 연못과 9개의 샘이 있다. 이중 중앙의 큰 연못을 용지(龍池)라고 한다. “신라 26대 진평왕 때 한림학사 경주 이씨인 광옥의 딸이 병을 얻어 고생했다. 이 딸은 용지라는 못에 가서 목욕 재계하고 기도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치병을 하던중 용의 아들(龍子)을 만나 잉태하고 집에 돌아가 아들을 낳았다. 낳은 아기의 겨드랑에는 조(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사실을 이광옥이 왕에게 상소하니 왕이 이상히 여겨 ‘조’(曺)라는 성을 내리고 이름을 계룡이라 지어주었다”

이같은 내용은 창녕 조씨 대종회가 밝힌 득성의 경위와 시조 태사공에 대한 설화다. 계룡은 성장함에 따라 매우 총명해서 진평왕이 사랑하며 여러 가지 관직을 내리고 사위를 삼아 태사에 이르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씨 세보에 따르면 그의 5대손인 조겸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조겸은 신라말에 아간시중(영의정급)을 지냈고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신라가 망하자 토함산에 숨어 풍월을 벗삼아 망국의 설움을 달랜 조흠의 아들.

조겸은 고려태조 왕건의 딸 덕공공주와 결혼했다. 조겸의 손자 연우로부터 8대에 걸쳐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고 그 후 6대를 내려와 조송무 이후 6대에 걸처 소감(少監)을 배출, 광산 김씨의 10대 평장사와 함께 기록적인 일로 전해진다.

고려 현종 때 조자기는 거란족과 여진족의 침입을 여러차례 토벌한 장군. 창녕 조씨는 고려말에 와서도 조민수와 익수, 경수 등 3형제를 배출했다. 민수는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섬멸했고 우왕 초에는 경상도순문사로 도처에서 분탕질을 일삼던 왜구를 토벌한 명장. 이성계의 유명한 위화도 회군때는 동조했으나 문하시중으로 이성계측의 야심에 반기를 들었다가 창녕으로 귀양가 불우하게 숨을 거둔 지조를 보였다.

그의 아들 조린은 이조 태종이 한성판윤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불응,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킨 절신.

경수의 손자 조석문은 창녕 조문의 유일한 영의정이었다. 그는 세종 16년 문과에 급제, 세조 때 도승지에 올랐다. 그 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1등공신이 된 후 좌의정을 거쳐 영상에 올랐다.

석문의 5촌조카인 조위는 대문장가로 영남 사림의 거물 김종직의 처남이자 수제자. 그는 신진 사류의 지도자로 홍문관에만 15년간 재직한 골수 선비였다. 조위는 국문학상 주요한 자료인 ‘두시언해’를 지었으나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에 연루돼 순천으로 귀양가 숨졌다. 그는 서예에도 뛰어났고 문집으로 ‘해계집’이 전하며 주옥같은 시문이 ‘동문선’ 등에 수록돼 있다.

조위의 동생인 조신은 역시 문장가요 시에 능했다. 그는 역관으로 일본에 3번, 연경에 7번 사신으로 다녀와 외국에까지 문명을 떨쳤다.

조선조 중기의 대표적인 석학은 남명 조식. 그는 학문에 뛰어나 여러 차례 벼슬길에 천거됐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성리학 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주력했다. 그의 문하에는 김효원과 정인홍, 곽재우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남명 조식은 학문을 닦은 후 그 실행을 주장했고 불의에 항거하는 선비정신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등 문하생 57명이 의병을 일으킨 것도 그의 가르침 때문이다.

한편 다른 계파인 고려말 명신 조익청은 충숙왕 때부터 공민왕 까지 3대의 왕을 잘 보필했으며 부원군으로 봉해지고 공민왕의 조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 신충은 희천군사를 지냈다.

신충의 아들 5형제중 상보는 사의요, 상점은 현감이며 상치는 부제학이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길에 더 나가지 않고 영천으로 퇴거하여 ‘노산조부제학통인 조상치지묘’라는 묘비를 미리 써 놓고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절신이었다.

상치의 손자 구족의 아들인 계은은 중종반정 때의 공의로 정국공신에 봉해졌다. 특히 계상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돼 13명이 과거에 등과해 조창조씨 중 가장 현달한 집안이라 하겠다. 충정공의 아들 광원은 명종 때 우찬성을 역임했고 그의 종손 문수는 시문에 능하고 명필로 날렸다.

이밖에 중종 때 문무를 겸비한 조숙은은 왜구와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워 병판 좌찬성을 역임한 인물. 또 인조 때 우부승지를 지내고 시와 서, 화 3절의 칭을 들었던 조우인 등도 두드러진 인물이다. 조익순의 아들 광한은 고려 때 정당문학으로 1백20세까지 장수했고 그의 아들 계방은 직제학이었다. 창녕조씨의 다른 한 계파의 자손인 고려 때 문하시중왕백의 아들 수익은 충익공인데 이판이며 그의 아들 문택은 목은 이색의 문인이고 역시 이판을 지냈고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평장사 용기의 후손 희우의 6대손 홍립은 학문이 깊다.

창녕조씨의 대종회측은 “꿋꿋한 절개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이 조씨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한말에 와서 조성환은 육군참위로 국운이 다하자 김구와 이시영과 더불어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군정부장과 정무위원을 지냈다.

고당 조만식은 근세의 거목. 한일합방이 되던 무렵의 20대 청년이던 고당은 도산 안창호의 국내투쟁 이론에 큰 감화를 받아 민족지도자 이념노선을 결정했다. 고당은 일제 시대에도 국내에 머물면서 민족산업 증진과 생활조건 개선, 배일 독립정신 함양 등을 지표로 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고당은 북한이 공산화된 뒤에도 동포를 버리고 월남할 수 없다며 끝까지 북한에 남았다. 현대 인물로는 진보당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봉암씨, 민주당 정권 때 내무 및 법무장관을 지낸 조재천씨가 정계의 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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