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문후 아들딸의 간곡한 만류도 듣지않고 캄보디아로 가기로 했다. 어쩔수 없이 아이들이 필자를 비행장에 데려다 주었다. 나는 한국에도 잊을 수 없는 친구가 있지만, 캄보디아에서도 많은 친구가 있다. 한국 출발전 미리 연락해 두었더니, 캄보디아 공항에 내리자마자 두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한 친구는 퇴직한 그곳 은행장이고, 한 친구는 호텔을 경영하는 현지인이다. 애틀랜타보다 한국이 춥다고 겨울옷을 챙겨온 것이 이곳에서는 짐이 되었다.
자동차를 타고 친구의 호텔로 직행하면서, 그동안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느라 이야기꽃이 피었다. 다음날 5시 호텔방에서 일어났더니, 이미 날이 밝아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서 독립 기념탑에 갔다. 거기는 이 나라 사람들이 아침운동하는 코스다. 이곳엔 훈센 총리의 관사가 있고, 그 옆에 나란히 북한 대사관이 있다.
아침 식사는 프랑스 식으로 나왔다. 이 호텔은 종업원을 빼면 모두 프랑스 사람 전용 호텔이다. 한국 사람은 필자 밖에 없다. 호텔 안은 온통 야자수 나무와 열대식물로 가득찬 숲을 조성해 자연 환경을 살렸다. 식당 옆에 호텔 수영장이 붙어있어서, 프랑스 사람들의 수영 솜씨를 감상하면서 아침을 먹었다. 식사는 한식만 고집하는 필자지만 프랑스식 아침도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이 나라 캄보디아의 발전은 정말 눈부시다. 필자가 1997년 이곳에 사업차 왔을 때와 지금은 천양지차로 달라졌다. 하루가 다르게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3~40층 건물이 도시의 모양새를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다. 이처럼 개발도상국의 발전은 정말 눈부시다.훈센 총리가 비록 장기집권하고 있지만, 28년간 정치적 반대자 없이 일관된 정책을 취하니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르다.
공산국가는 전세계 어느 나라 할것없이 반대파 숙청으로 시작한다. 캄보디아 역시 공산당에 의해 170만명 이상의 양민이 학살됐는데, 특히 지식인은 모두 몰살을 당했다. '킬링필드'라는 곳에 가보면 사람의 해골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며, 그곳 박물관에는 잔인한 고문 장면과 학살 장면이 전시돼 있다.
캄보디아의 나이든 지식인은 그때 다 죽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젊은 사람뿐이다. 나이 많은 사람은 거의 숙청되었고,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아 많지 않아 노인이 적은 나라다. 이처럼 공산당 시대는 사람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현 캄보디아 지도자인 훈센 총리도 한때 공산당 크메르 루즈의 청년 장교였다. 하지만 1979년 1월 베트남의 지원으로 캄보디아 인민공화국 총리로 지명되었다가, 1985년 1월 14일 당시 정식 총리로 지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가 정권을 잡을 당시 나이가 33세였다. 공산당 장교에서 선거를 통한 선출직 국가지도자로 변신하고, 평화협상을 통해 국가를 민주주의 체제로 변화시키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한때 공산당이 지배하던 캄보디아지만 현재 좌경 사상을 가진 자는 없다.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제대로 겪어봤기 때문일 것이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보면 공산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