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3년 독일의 에이슬레반에서 태어난 마틴 루터(1483-1546)는 전형적인 중세시대 인물이었다. 루터의 중세적 신앙은 폭풍우 속에서 떨어지는 벼락과 천둥소리에 놀라, 수도사의 길을 서원하였다는 에피소드에 잘 나타나 있다.
루터가 믿었던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며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이 무서운 하나님의 징벌을 피하는 길은 오직 고행과 교회가 정한 참회의식을 통해 용서를 받는 길 밖에 없었다. 이러한 루터의 경직된 신앙은1505년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성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읽기 시작하면서 은혜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루터의 새로운 하나님 이해는 1511년 새로 설립된 비텐베르그대학의 성서를 가르치면서 그 신학적 깊이를 더하게 된다. 1518년까지 루터는 시편,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등을 강론하면서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인 오직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은혜로 받는 구원의 은총을 확신하게 된다. 특별히 1516-17년까지 진행된 갈라디아서 강론을 통해 율법의 준수나 인간의 선행을 바탕으로한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의한 구원이라는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사상이 수립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성서해석을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es)’이라고 불렀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이 성립된 배경에는 루터가 소속되어있던 어거스틴 수도회의 신학적 원류인 성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의 선행을 통한 구원을 주장했던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했던 어거스틴의 신학이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에서 재발견되기 때문이다.
14세기의 중세 신비주의자들이 강조했던 구원의 은총이 실현되는 과정에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위치만을 차지한다는 견해도 루터의 구원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루터의 새로운 기독교의 이해는 1517년까지 교황이나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면죄부의 남용을 경고하는<95개조>를 붙임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지만 <95개조>를 성당정문에 붙인 그 자체가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많은 중세 학자들이 이런 방법으로 신학적인 토론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95개조>의 인쇄본이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감으로써, 루터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루터의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의 불씨가 당겨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1518년부터 1524년까지 7년동안 초기 종교개혁은 독일내에서 루터 개인과 연관된 사건과 더불어 급속히 진행되었다. 면죄부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즉시 로마 교황청의 소환으로 이어졌지만(1518년), 삭소니의 영주 프레데릭(1463-1525)의 개입으로 로마 대신 독일의 영토인 아우구스버그(Augsburg)에서 루터의 사상을 검증하는 종교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루터는 아우구스버그에서 추기경 카제탄(1469-1534)의 심문을 받았지만 그는 면죄부가 성서상에 근거가 없다는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라이프지히에서 열린 도미니칸 신학자 에크(1486-1543)와의 신학논쟁에서도 루터는 로마의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면제부를 위시한 교회와 교권의 타락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의 주변에서부터 제도적인 변화를 초래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르치던 비텐베르그 대학의 커리큘럼은 중세시대 동안 변치 않고 지켜져 왔던 스콜라방식에서 탈피하여, 성서를 직접 읽고 연구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를 이용한 신학해석의 방법에서 성서 66권 자체가 신학 연구의 기본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1519년) 및 시편 주석 (1519-21년)의 출간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520년은 루터가 종교개혁의 시금석이 되는 중요한 세권의 책을 동시에 출간한 해다.
<독일제국의 기독교인 제후들에 고함>
<바빌론의 포로가 된 교회>
그리고
<기독교인의 자유>
를 통해 루터의 종교개혁은 확실한 신학적 기반과 제도적 프로그램을 동시에 획득하게 된다. 또한 1520년은 루터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해다. 1520년12월 10일, 로마로부터 전달된 교황 레오 10세의 교서(Exsurge Domine)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움으로써, 루터의 반 가톨릭적 입장이 공식화 됐다.
당시에 로마 교황청의 파문 결정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황청과 정치적으로 긴장관계에 있던 독일의 황제 찰스 5세는 자신의 동의 없는 루터의 처벌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황제는 루터를 보름스로 소환하여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1521년에 열린 보름스의 종교회의(Diet of Worms)에서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프리드리히의 개입으로 루터는 보름스에서 비텐베르그로 돌아오던 길에서 바트버그의 성채로 방향을 바꾸어 그곳에 은신하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30년 멜랑히톤에 의해 씌여진 아우스버그 고백서의 채택과 1546년 마틴 루터의 사망, 그리고 1555년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간의 평화 협정을 거치면서 유럽에서 서서히 정착되어졌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즈윙글리를 위시한 스위스 종교개혁자, 아나뱁티스트, 종교 개혁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존 칼빈, 그리고 영국의 종교개혁으로 거치면서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자극을 받은 가톨릭교회의 반 종교개혁의 움직임과 가톨릭 교회 자체의 개혁적인 운동은 트렌트 종교회의라는 역사적 결과로 나타났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을 이룬다. 특별히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이었던 ‘오직 성서(sola scriptura)’를 통하여 일반 성도들이 교회의 전통이나 사제의 전달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성서의 내용을 접하게 됨으로써 ‘교회의 전통보다 앞서는 성서의 권위’라는 개신교회의 중심 사상이 정착되게 되었다.
이러한 성서 중심의 신앙은 일반인의 성서강독을 위한 성서번역을 촉진시켰으며, 유럽의 각 나라 말로 성서번역이 진행됨으로써 각국의 초등교육이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였던 ‘오직 성서’ 덕분에, 성서에 대한 치밀한 학문적인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도 종교개혁의 공헌이다. 또한 주어진 성서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 진행됨으로써 성서해석학이 발전하게 된 것도 중요한 역사적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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