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기독교역사를 바꾼 30대사건] 미국의 제1차 심령대부흥 운동

Washington DC

2003.06.25 17:41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머리로만 믿는 차가운 신앙 거부, 감리교·침례교 부흥 토대 마련
 1730년부터 1770년까지 미국 동부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났던 제1차 심령 대부흥운동은 계몽주의 철학이 지배하던 유럽, 특별히 영국과 독일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던 18세기의 심령대부흥은 합리적 이성을 최고로 간주하며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만을 인정하던 계몽주의적 시대정신에 대한 반발이었다. 차가운 머리로만 믿는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며, 자신의 죄된 본성을 발견하고 진정한 회개를 통한 ‘믿음에 의한 구원’을 사모하였던 18세기 중엽의 심령대부흥은 ‘미국의 복음주의 신앙’의 기본 방향을 결정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제1차 심령대부흥은 펜실바니아와 뉴저지 지역의 장로교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목사 윌리엄 테넷의 주도로 시작된 이 지역의 심령부흥운동은 성만찬을 중심으로 전 회중이 참가하는 집회형식으로 발전되어 갔다. 펜실바니아와 뉴저지 지역의 열기는 곧바로 미국의 동북부 지방인 뉴 잉글랜드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특별히 이 지역에서는 청교도들과 침례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의 심령대부흥과는 달리 뉴 잉글랜드 지역의 심령대부흥은 철저한 칼빈주의 전통과 오순절의 성령체험이 동시에 강조되었다.

 이러한 칼빈주의적 경향은 제1차 심령 대부흥운동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과 설교에 잘 나타나있다. 철저한 종말론적 입장에 서 있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천년왕국을 앞당기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다.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이라고 불리는 에드워즈의 종말사상은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건국정신과 맞물리면서 ‘미국 =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라’라는 등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제1차 심령대부흥 운동의 열기가 미국이라는 신생독립국가의 자의식을 강화하는 종교적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 당기기위한 ‘기독교인의 사명감’과 미국이라는 독립국가의 선택의식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더불어 제1차 심령대부흥을 미 동부지역 전역으로 확산시킨 사람은 영국 성공회 소속 목사이며 존 웨슬리와 함께 초기 감리교회를 이끌었던 조오지 휫필드였다. 흔히 ‘칼빈주의 감리교회(Calvinistic Methodism)’의 시조로 알려져있는 휫필드는 감정에 호소하는 열광적인 설교와 효과적인 부흥회 운영으로 수많은 미동부의 회중을 개종시키는 탁월한 능력의 설교자였다. 부흥사로서의 휫필드의 능력은 단순히 그의 열광적인 설교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18세기부터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한 식민지 경제의 새로운 흐름을 파악하고 주도적인 인쇄매체로 떠오른 신문을 이용한 대대적인 홍보전략을 통하여 부흥집회를 상업적인 흥행과 연결하였다.

 그의 탁월한 부흥회 운영은 지금까지 빌리 그래함을 포함한 미국의 부흥사들이 모방을 할 정도다. 그러나 심령대부흥 운동의 감정주의와 열광주의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휫필드의 부흥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성령의 역사가 아닌 정신병적 집단 발작증상이라고 몰아붙였다. 도덕주의를 주장하던 영국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열광주의의 뒷면에는 미국식민지의 부정한 윤리환경이 자리잡고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답변을 시도한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그는 조오지 휫필드의 부흥회에서 나타나고 있던 지나친 열광주의를 일단 경계하면서, 심령대부흥의 열기를 단순히 감정의 통제불능이나 집단 정신이상으로 몰아붙이는 견해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유명한 저서 <종교적 감성> 에 기록되어 있는 에드워즈의 입장을 요약한다면, 심령대부흥의 열기 가운데 나타나는 환상, 입신, 기절, 방언, 예언등의 현상은 성령의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역사라고 볼 수 없지만, 진정한 ‘회심의 체험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성도의 변화된 삶 가운데 나타나며, 일시적인 현상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보았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심령대부흥의 열광주의는 교단별로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전통과 교구제도를 엄격히 준수하는 영국 성공회 소속 목사들과 엄숙주의를 고수하던 퀘이커들은 심령 대부흥운동을 반기독교적인 감정주의라고 비난하였다. 회중교회와 장로교회는 지지파와 반대파로 양분되었는데 심령대부흥에 참여한 교회는 ‘뉴 라이트(New Light)’라고 불렸고 참가를 반대하던 교회는 자신들을 ‘올드 라이트(Old Light)’라고 불렀다.

 심령대부흥의 열기를 통해 새로운 교단적 발전의 도약을 삼았던 교단은 감리교회와 침례교회였다. 특별히 성화된 삶을 강조하던 존 웨슬리의 신학과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였던 침례교인들의 신학이 심령대부흥의 정신과 일치되면서 이 두 교단이 미국의 대표적 교단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지금도 이 두 교단이 미국교회에서 가장 많은 교인수를 확보하고 있음을 볼 때 미국의 건국 이전에 있었던 제1차 심령대부흥이 미친 역사적 영향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18세기중반 미 동부에서 전개된 제1차 심령대부흥은 미국교회사 뿐만 아니라 세계 기독교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불리는 19세기의 개신교회 해외선교는 심령대부흥운동의 종교적인 열기를 바탕으로 확산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년왕국설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선택의식과 결합되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해외선교의 사명을 자신들의 의무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흔히 ‘백인남성들의 부담감(White Men's Burden)’이라고 관용적 표현으로 요약되는 이러한 미국 백인들의 선택의식은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포함한 채 19세기 세계 선교를 추진해가는 역사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