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년전 어느 고택을 지켰을지도 모를 향나무의 일부가 부채살로 가지런히 제 몸을 눕혀, 21세기 그것도 LA 한복판에서 버젓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코리아타운 갤러리아 3층, 세종서적 폴 최사장이 내놓은 부채는 단번에 하나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긴 모시 도포자락에, 흰 수염 휘날리는 훈장님이 더운 여름날 매미소리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서 왼손으론 수염 가다듬으며 나머지 한손으로 이 부채를 부치는 장면이 그것이다.
부채의 원주인이 최사장의 할아버지 것이라니 그리 크게 빗나간 상상도 아닌 듯하다.
사실 이 부채가 최사장에게 들어오기까지는 그렇게 큰 노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89년 이민길에 오른 최사장은 LA에 도착해 이민 보따리를 풀다 보니 그가 즐겨 읽었던 책사이에서 이 부채와 아버지가 남긴 편지 한장이 끼어 있더란다.
“깜짝 놀랐죠. 할아버지가 아버지께 물리신 부채였는데 아버님이 이걸 제게 주시겠다는 얘기가 전혀 없었는데 이민 가방속에서 이걸 발견했으니 말입니다. 편지엔 제 다혈질인 성격을 우려한 아버님이 그럴 때마다 이 부채를 부치면서 한 호흡씩 쉬었다 생각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책을 즐겨 읽었다는 최사장의 부친은 여름엔 한손에서 이 부채를 떼놓지 않았다고 한다. 부전자전일까. 경영학을 전공하고 한국 금융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최사장은 세월을 돌고 돌아 이제는 책방 주인이 됐다.
“7년전 부친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부채를 볼 때마다 아버님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시류속에서 여유를 잃지 말라고 하셨죠. 사느라 바빠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이젠 책장속에 갇혀 있는 부채를 가끔은 꺼내 생활속에서 부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중한 모든 물건들이 그렇듯 그역시 이 부채를 큰아들에게 물려 줄 생각을 하고 있다.
해병대 입대를 한달여 앞두고 있는 큰 아들 단(18)군이 첫 휴가를 나올 때 이 부채를 주려한다고 말한다.
“사실 그간 얘기를 안해서 아내도 아이들도 이 부채에 대해 잘 모릅니다. 이번 기회에 아버지가 제게 말해주고 싶어했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저 역시 아들에게 전해 주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저도 짧으나마 편지를 곁들여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방에 둘러싸인 책 속에서 최 사장이 부치는 부채가 어쩐지 낯설지 않다. 그 익숙한 풍경이 정겹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