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여유롭고 안정적인 직업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약사. 그러나 한인약사들의 초기 정착사는 길고도 험난했다.
본국출신 약사들의 이민물결이 밀려온 것은 1971년부터. 미국 내 의료인력의 부족으로 미 정부가 외국 의사, 간호사, 약사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청운의 꿈을 품고 태평양을 건너온 약사들의 숫자가 10년 사이 무려 1천5백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암담한 현실에 마주쳤다. 미국에 와 보니 실제로 미 약사 면허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던 것. 의사나 간호사는 인턴십을 거쳐 면허를 딸 수 있었지만 약사만은 예외였다. 미국 약대는 6년제지만 한국 약대는 4년제라는 게 그 이유. 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미국 약학대학에 다시 편입해 부족한 학점을 채워야 했던 것이다.
▶초창기〓당시의 막막했던 상황을 박제인(62·빌리지약국)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미국에 오면 당장 약국을 개업할 수 있겠거니 했는데 너무 큰 충격이었죠. 대학을 다시 들어가려니 영어며 비싼 학비 때문에 엄두가 안 나고, 당장 생계가 막막해 세탁소, 리커스토어, 비타민 회사 등에 취직해 막노동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약사 이민자들은 1972년 ‘가주한인약사회’를 설립하고 수 년 동안 길고 힘든 투쟁을 벌였다. “75년에는 타민족 약사들과 함께 LA시청, LA 타임스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76년에는 워싱턴까지 날아가 시위를 했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어요. 결국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갈 길을 찾았죠. 전국에 있는 76개 약대를 죄다 수소문한 끝에 더러는 편입에 성공하고, 더러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생계를 위해 약사를 포기하고 다른 직업으로 전업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5대 회장을 지낸 박보욱(66·가디나약국)씨의 얘기다.
당시 캘리포니아에 있는 약학대학은 세 곳에 불과해 많은 이들이 약대편입을 위해 타주로 떠났다. 대부분 40대 전후의 만학도였던 이들이 공부를 마칠 즈음 전국의 약대에서 최고령 졸업자를 전부 한국사람이 차지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거쳐 약사자격증을 딴 사람들이 한인타운에 하나 둘씩 약국을 개업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 이때 문을 연 약국들이 올림피아 약국(박창규), 영빈약국(윤창기), 3가와 노먼디의 시온약국(최대영), 올림픽의 리스약국(이상주)과 신스약국(신한경) 등이다.
▶전환기〓그 후 한인약국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1984년부터 시작된 ‘외국약대졸업생 평가시험(FPGEE:Foreign Pharmacy Graduate Equivalency Examination)’ 덕분이었다. 외국 약대졸업자들이 대학에 편입하지 않고도 검정고시를 통해 면허를 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가주한인약사회는 당장 FPGEE를 위한 시험준비반을 조직했다. 박보욱씨를 중심으로 박제인, 이주혁, 김미성, 김영식, 이병학씨 등 현직 약사들이 직접 강의를 맡기로 하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이때 응모한 인원이 60여명. 대부분 약사이민을 왔다가 포기한 채 다른 직업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학생들을 강의하던 유창호씨(49·웨스턴 약국)는 “갓 이민 온 30대 젊은이부터 60대 노인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죠. 학생들은 물론 강의를 맡은 약사들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강의하고, 또 집에 오면 교재를 만드느라 밤을 새곤 했어요. 당신들이 워낙 힘들게 약사가 됐기 때문에 후배들에게는 고생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죠”라고 회상한다.
이렇게 어렵게 공부한 끝에 FPGEE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30명. 그러나 그 후로 계속 이어진 약사면허시험과 인턴십, 토플시험 등을 거치며 정식약사가 된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현재 마틴 루터 킹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김인순씨가 그 주인공. 강의를 주도했던 박보욱씨는 이 때의 감격을 “첫 딸을 낳은 기분이었다”라고 표현한다. 김인순씨는 그 이후에 변호사 시험까지 합격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수년간 시험준비반을 운영하며 얻은 노하우로 2∼3년 내 한인약사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당시 FPGEE를 통해 약사가 된 사람이 현재 가주약사회의 주축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홍종화(올리브 약국), 김소연(윌튼약국), 김미경(수정약국), 노영희(윤약국)씨 등. 지금은 은퇴한 임동호씨는 약사의 길을 포기하고 리커 스토어를 경영하다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약사면허를 따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당시 회장이었던 이상주(58)씨를 중심으로 대형약품도매상을 대상으로 한인약국들이 똘똘 뭉쳐 공동구매사업을 벌임으로써 소규모 약국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을 가장 보람있는 일로 꼽는다. 당시 한인약사들의 단결력을 부러워하던 타인종 약사들이 ‘나도 코리언이다’라며 공동구매에 참여시켜 달라고 떼를 쓰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회원약사 1천여 명, 소속약국이 1백30곳이 넘는 대조직으로 성장한 가주약사회. 현재 가주약사회 회장인 홍종화(49)씨는 “약사는 본래 경쟁이 치열한 직종이지만 한인약사들은 스승-제자 관계로 묶여 있기 때문에 타운 내 어떤 단체보다 단합이 잘되고 화목하다”는 점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꼽는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가주약사회는 한인약사들의 재교육과 후진양성, 커뮤니티 봉사활동 등 새로운 미래의 청사진을 마련하느라 발걸음이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