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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이야기-고구려의 왕산악(3)

Chicago

2003.08.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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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의 명인 왕산악을 조선의 박연, 신라의 우륵에 이어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소개한다.
왕산악은 고구려 사람으로,거문고의 제작자이며, 거문고 연주의 대가였다.

왕산악 영정.

왕산악 영정.

 고구려 양원왕 8년인 552년,중국 진나라에 다녀온 사신이 그곳에서 유행하던 줄이 일곱인 칠현금을 한대 가져왔는데 아쉽게도 국내엔 아무도 그 악기를 연주 할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차에 마침 음악에 관심이 많고 재주가 뛰어났던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로 있던 왕산악이 이 칠현금을 연구하여 고구려에 걸맞는 악기로 새로 만들어 연주 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악기가 6개의 줄과 밤나무와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이다.

 왕산악이 새로 만든 악기로 100여곡을 지어 연주하였더니, 어디선가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설화가 있어 검은 학(현학)이 춤을 춘 악기(금)라는 뜻의 현학금,혹은 현금이라 불려지기도 했다는 내용이《삼국사기》32권에 전한다.
'현금'은 우리 말로 '검은 금'인데, 이 말이 변해서 오늘날의 거문고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이렇게 탄생하고 연주되던 거문고는 신라에 전하여져서 옥보고, 속명득, 귀금, 안장, 청장, 극상, 극종 등의 계보로 전승되었으며, 극종 이후 즉, 옥보고로부터 약 1세기가 지난 뒤부터 세상에 알려져 널리 보급되었다.
소리가 우렁차면서도 깊고 장중하여 남성적인 악기로 대표되며 예로부터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하여 학문과 덕을 쌓은 선비들 사이에서 숭상되었고 지금도 그 여백의미가 유감 없이 발휘되는 줄풍류(궁중 음악이 아닌 양반들 사이에서 이루어 지던 실내악.이 또한 정악의 범주에 든다)를 포함한 우리 음악의 여러 분야에서 출중한 멋을 나타내며 사랑 받고 있다.

 비록 왕산악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삼국사기에 짧게 전해지고 있어 그의 활동연대와 거문고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그 먼 옛날, 외국에서 들어온 문물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재창조해내는 지혜를 보여준 왕산악은 업적은 창의성이 중시되는 오늘날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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