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8일은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원예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탄신일이다. 우장춘 박사는 한국인 부친과 일본인 모친 사이에 일본에서 출생하였지만 해방 이후인 1950년 3월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1959년 한국인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극히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일본 동경제국대학 (현 동경대학교)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한국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위해 한국전쟁동안 군복무도 했다. 한국농업연구소의 초대소장으로서 전쟁후 우리나라의 농업을 재건하고 현대화하는데 지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우장춘 박사가 발명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씨없는 수박은 기하라 히토시가 1943년에 개발한 것이다. 우장춘은 이 씨없는 수박을 만드는 기술을 육종기술의 홍보 차원에서 도입하여 소개한 분이다. 휴전이 이루어진 1953년 경부터 한국정부와 언론은 ‘씨없는 수박 시식회’를 개최하여 한국전쟁후 피폐해진 사람들 마음에 자부심과 희망을 심어주려 애썼다.
일본에서 성공적인 육종학자로 살아갈수있었음에도 한국농업연구소의 운영을 부탁받은 우장춘은 선뜻 귀국을 택한다. 가족을 위해 쓰라고 받은 ‘이적료’도 몽땅 한국에 들여올 종자구입에 사용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배추, 무우, 유채,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 수많은 채소의 종자를 확보하였고 벼농사의 개선에도 힘을 기울였다.
연구소에서도 항상 고무신을 신고 있어서 ‘고무신’박사라고도 불리웠던 우장춘 박사의 업적 중엔 다음과 같이 친숙한 것들이 많다. 바이러스에 강한 강원도감자의 개발, 한국환경에 맞는 배추의 개발, 제주도 여건에 맞는 감귤재배를 추천, 유채를 도입하여 제주도에서 재배하도록 함, 그리고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을 것을 추천…지병인 십이지장궤양으로 생을 마감했던 그는 병실에서도 연구중이던 벼품종을 주사액 옆에 매달아 놓고 관찰했다고 한다.
우장춘 박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태어나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다 간 분이기도 하다. 올해는 2014년 갑오년이고 내년이 을미년이 된다. 120년전의 갑오년 을미년은 외국세력이 한반도에 눈독을 들이고 내부로는 조선왕조와 신분제도가 흔들리던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우장춘 박사가 태어나기 3년전인 1895년의 을미년 10월 8일, 한무리의 일본인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반일성향의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폭거를 저지른다. 을미사변에는 조선인들도 연루되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신식군대인 훈련대 대장이었던 우범선이다. 친일성향인사로서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그는 사건후 일본으로 피신한다. 우범선이 그곳에서 일본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우장춘 박사이다.
아버지 우범선이 조선정부의 자객에게 암살되었을때 우장춘은 5살이었다. 조선에서는 역적으로 여겨지고, 일본에서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조선인 우장춘의 가족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어머니와 본인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동경제국대학에서 교육을 받기에 이른다.
우장춘이 귀국할때 일본인 부인과 자녀는 일본에 남았다. 이승만 정부는 그런 그를 신뢰할수 없다며 출국을 금지하였고 그가 모친상을 당했을때만 일시적으로 일본 방문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인 어머니에 의해 키워져 한국말은 하지 못하였지만 그는 꿋꿋하게 한국이름을 지켰었다. 하지만 한국의 권력자와 정치가들은 그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냉대하고 괄시하였다.
아버지의 과오때문에 그가 그렇게 열심히 조국을 위해 봉사했던것일까 물을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다. 그의 이름처럼 (長春) 그가 긴 봄날을 즐기며 이제는 제법 잘 살게된 조국을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