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절규에 찬 경구가 바로 엄문(嚴門)의 가헌(家憲)이다.
어린 왕 단종에 바친 충절로 보복의 칼날 앞에 서더라도 결코 두려워 않겠다던 엄가의 12세손 엄흥도(嚴興道)의 유훈이 그대로 문중의 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까마귀 밥이 되도록 ‘누구든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내려져 있었다.
충의공 엄흥도. 그는 영월 땅의 호장(향직의 우두머리)이었다.
서릿발 같은 엄명이 자신은 물론 일족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그는 거적에 싸인 구왕(舊王)의 시신을 수습, 동을지산(冬乙旨山·현재 단종의 묘가 있는 장릉)에 염장했다. 그리고 어린 핏줄 하나에 여생을 의지, 성을 갈고 영남지방 어디론가 훌훌 떠나 버렸다.
현종에 이르러 단종의 무덤이 봉릉(封陵)되고 우암 송시열의 건의로 단종의 주검을 수습했던 옛사람을 찾았으나 엄씨들은 무슨 재난이 닥칠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ㄱ문의 족적을 적어둔 문적(門籍)까지 없애고 자꾸만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더구나 단종 묘에 선영이 있던 엄씨들은 묘가 능으로 추봉(追封)되면서 사방 5리 안에 있는 개인묘를 모두 옮기라는 어명에 따라 선영까지 포기하는 운명을 맞았다.
이 난리로 오늘에 이르러서도 후손들은 10세조까지의 묘를 모두 실전(失傳)하는 아픔을 안고 있다.
엄흥도의 충절과 인륜의 도가 알려진 것은 영조 때. 순조에 이르러서야 충의공이란 호와 함께 사육신과 더불어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됐다.
엄씨의 본관은 상주·하음·광주(廣州) 등 60여본이 전하나 모두가 영월 엄씨의 분파로 한 핏줄 자손들이다.
통일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들어왔던 엄시랑(嚴侍郞)이 시조다. 중국 한나라 대시인이었던 엄자릉(嚴子陵)의 후예이자 당나라 상국(相國·국무총리급) 화음(華陰)의 일족이었던 그는 당나라 현종이 새로운 악장을 만들어 이를 인근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로 이 땅에 들어왔다.
그는 당나라에 정변이 일자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 남아 나성군(奈城郡·지금의 영월)을 본거지로 가계(家系)의 문을 열었다.
이어 이 땅에서도 정변이 일어 고려가 개국을 맞았다. 그는 여태조(麗太祖)로부터 나성군(奈城君·성주)으로 봉해져 영월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이를 인연으로 영월을 본향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 후손은 세 아들을 중심으로 맥이 갈라져 장남 태인(太仁)은 고향을 지켯고 차남 덕인(德仁)은 서울로 이주, 가계를 이었으며 3남 처인(處仁)은 함경도로 이주, 현재 북한 엄씨의 대부분이 그의 후예다.
고려조에서 수많은 명신현군을 배출한 엄씨는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11세손인 유온(有溫)이 개국공신으로 가선대부 도총제부(嘉善大夫 都總制府·동지총제(同知總制)를 지내는 등 대대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에 이르러 엄씨 가문은 호된 시련을 겪는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죽음이 유온의 4대 손녀이자 성종궁의 귀인(貴人)이었던 엄씨 등을 비롯하여 윤필상 등 12대신의 간계라는 임사홍의 모함으로 이들 대신들과 함께 엄 귀인의 아버지 사직(司直)과 오빠 계(誡) 등 두 오빠가 같이 참살을 당한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은 역적으로 몰려 단죄를 받게 되는 이른바 갑자사화다.
이로 인해 엄씨 가문은 한동안 빛을 잃은 듯 하다가 중종에 이르러 누명을 벗고 16세손 흔(昕)이 대제학으로 우뚝 솟아오르면서 선조들의 맥을 다시 이어 내려간다. 그의 시조 한수가 ‘가곡원류’에 실려 전해온다.
선(善)으로 패한 일 보며/ 악으로 이긴 일 본가/ 이 두 즈음에 취사(取捨) 아니 명백한가/ 평생에 악한 일 아니하면 자연 유성(有成)하리라.
영조 때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한명(漢明)과 정조 때 서화가로 이름 높던 계응(啓膺)은 부자간이다.
특히 한명은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한석봉 이후 최고의 명필로 고금의 서법을 집대성한 ‘집고첩(集古帖)’과 ‘만향제시초(晩香齊詩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엄씨는 근세에 이르러 선지자의 집안으로 신문물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 섰다.
이조 말의 개화파 인물인 세영(世永)은 국제정세에 밝았던 초기 외교가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고종 22년(1885년)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점령햇을 때는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고 있던 도웰 함대사령관과 담판을 하기도 했다.
엄씨가 낳은 유일한 왕비인 고종비(영친왕의 생모이자 이방자 여사의 시어머니)는 우리나라 개화여성의 여멍기 양정·진명·숙명 등을 설립해 오늘날 사학의 요람으로 남들어낸 장본인이다.
한말 엄씨 가문은 맵고 맵고 곧은 가풍을 이어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안중근 의사와 함께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모아 두만강을 건너 함북 경흥의 일본 군경에 큰 피해를 입혔던 의병장 엄인섭은 무력항쟁이 여의치 못하자 연해주에 정착, 농업에 종사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엄순봉은 만주로 건너가 1933년 북만주 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한족(韓族)총연합회를 편성, 청년부장에 취임했다. 만주일대 동포들을 상대로 항일투쟁 의식을 고취시키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백정기 의사 등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또 상하이 거루민회를 조직,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이영로를 추적 끝에 응징 살해하고 체포돼 순국한 열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클 선수로 일제하 우리 국민들에게 비행사 안창남과 함께 신문명의 총아였던 엄복동도 근대 엄씨 가문의 인물이다.
민주당 정권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엄상섭은 율사로서 뿐 아니라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제 3공화국에서 내무부장관을 2차례 역임했고 주일대사를 지낸 엄민영은 유능한 행정가·외교가로 그 이름이 높았다.
엄요섭 또한 외교가로 주 에티오피아 대사를 지냈다. 엄씨는 국제사교친목단체인 와이즈맨클럽 총재에 선임되기도 했고 한 때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관계에서는 도지사·부지사를 역임한 엄병길·병건씨가 있으며 엄영달·엄기표·엄정주·엄병학·엄대섭 등이 국회에서 활약했다.
그중 엄영달은 원래 외교관 출신으로 9대 국회에 신민당 공천으로 진출한 뒤 공산권 불가리아에서 열린 국제의원연맹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활약이 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엄대섭은 우리나라 마을문고 운동의 창시자. 외솔상·막사이사이상 등 사회봉사부문상을 받았던 사회운동가이다.
또 도서관연구회를 발족시켜 도서관 운동을 계속하는 외에 사회교육협의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문화예술계에서는 대중들의 많은 인기를 누렷던 테너 엄정행이 있다. 아름다운 음성에다 깔끔한 용모까지 갖춘 그는 ‘비목’ ‘목련화’ 등 일련의 우리가요를 통해 클래식의 대중화, 가곡의 상품화에 선구가 됐다. 60년대 청춘영화의 꽃 엄앵란도 빼놓을 수 없는 엄씨 가문의 인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