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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사이] 한국 배, 미국 배

New York

2003.11.1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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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주

서울대 강사·여성학



일전에 친구네 집에 갔더니 먹음직스러운 한국 배를 내놓았다. 달고 물이 많고 적당히 와삭와삭 했다. 물 많은 과일을 좋아하는 작은애는 맛있어라 하면서 여러 조각을 먹었다.

여기서는 우리가 흔히 먹는 큼직하고 둥근 배를 ‘아시안 페어’라고 부른다. 미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배는 조롱박처럼 생겼고 크기가 작고 물이 적은 편이고 약간 시큼하다.

나는 의문의 여지없이 이렇게 생각했다. 미국 사람들이 아시안 페어를 맛보고 나면 당연히 미국 배보다 한국 배를 더 좋아하게 될 거라고. 딱딱하고 시큼하고 서걱서걱한 배보다는 달고 물이 많은 와삭와삭한 배를 더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서관 ESL 튜터인 메리 할머니에게 맛있는 한국 배를 맛보게 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암투병 중인 메리 할머니의 잃어버린 입맛을 잠시나마 돌려놓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그런데, 미국에 산 지 십년이 넘은 친구 남편 말이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시큼하고 딱딱한 배를 달고 물이 많은 배보다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하면서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친구 남편은 여러 종류의 과일 사진이 들어있는 책을 건네 주었다. 그 책을 펼쳐 보니 아시안 페어는 많은 종류의 배 중 하나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수 많은 과일들이 있었다.

사과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는 크고 단맛이 도는 후지 사과를 주로 깎아 먹지만 미국 사람들은 작고 새콤한 사과를 통째로 먹는 편이며 큰 사과는 주스용 혹은 요리용 사과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게다가 사과의 종류가 아주 많고 종류에 따라 쓰임새도 다양하며 사과를 이용한 음식도 발달해 있다고 한다. 사과 쥬스(애플 사이다)는 미국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대표적인 음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입맛이라는 것 역시 문화이기 때문에 그도 그럴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이내 들었다. 내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했던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김치를 즐겨 먹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편에서는 여전히 나와 우리의 입맛을 잣대로 생각하는 혹은 생각하고 싶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슈퍼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진열대에 올라 있는 과일들과 야채들을 유심히 본다. 여기 있는 동안 내가 전혀 그 맛을 가늠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과일과 야채를 시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내게 익숙해서 최고의 맛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다양한 맛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면서.

그러니 ‘(당연하게) 이게 더 맛있는데’ 하고 주장할 일이 아니라 ‘이런 맛이 있고 나한테는 이게 더 맛있거든 그러니 한번 맛볼래 ’ 하며 정중하게 권해야할 일이다.

어떻게 해도 식성이 달라지지는 않지만 다양한 종류의 다른 맛을 시험해봄으로써 내 입맛의 상대성과 구체성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른 맛을 시도해 보려는 자세는 열린 마음과 통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글쓴이 노영주씨는 뉴저지 럿거스대학 방문교수로 와 있는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으며 현재 뉴저지 웨스트우드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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