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생활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을 때 수필은 제작되는 것이다(인용자 강조).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이 글에서 김광섭은 수필문학은 “탁마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으로 단순한 기록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한다. 김광섭에 따르면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것이 아니라, 시나 소설, 희곡 등 다른 장르와 달리 논리적 의도나 의식적 동기를 배제한다는 뜻이다. 수필은 또 “붓 가는 대로” 쓰기 때문에 “개성적이며 심경(心境)적이고 경험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 특징이다.
“붓 가는 대로”, 즉 무형식의 형식으로 쓰는 수필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찾기란 어렵겠지만, 김광섭의 글은 한 가지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앞에 인용한 대목의 강조된 부분을 보자. 김광섭은 수필이 개성적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부딪침”1)이 있어야한다고 한다. 대상과 추억에 부딪치는 것이 수필의 동력이다. 수필의 화자는 객관적 대상뿐 아니라 심경, 즉 추억과 기억의 이미지에 부딪친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물과 자연의 풍경, 유년의 추억과 마음 저 밑바닥에 꽁꽁 묻어둔 상처들을 어느 날 문득 조우할 때 수필의 계기가 마련된다. 어떤 요구나 계획된 의도가 아닌, 부딪침에서 “스스로” 나온,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듯이”, 즉 “붓 가는 대”로 글이 시작된다.
이 부딪침은 하나의 ‘사건’2)이다. 사건은 역사적 시공간에서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방식이다. 사건은 모든 의미화 혹은 개념화 과정에 선행된 구체적 현상이자 ‘해프닝’이다. 우리의 삶은 이런 사건들로 시작해서 끝난다. 탄생 그 자체가 이미 사건이며,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한 인생의 사건들이다. 생의 종착역, 죽음도 하나의 사건이어서 우리는 한 존재의 사라짐을 애도하는 예식을 치른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사건을 의미화 혹은 재현하는 과정이다. 시나 소설, 희곡이 사건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수필은 사건, 즉 부딪침의 해프닝에서 촉발되는 자아의 진솔한 반응을 담는다. 자아가 경험하는 온갖 부딪침을 있는 그대로 언어로 옮기는 문학이 수필이다. 그래서 김광섭은 수필은 어디에서 어느 때나 인간사회에는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장르라고 한다.
수필다운 수필에는 부딪침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은 ‘타자’이다. 현대철학에서 ‘타자’는 나를 포함한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 남이라는 뜻의 ‘타인’과 달리 ‘타자’는 대상, 신과 자연 등 나 아닌 모든 것뿐 아니라, 내 안의 타자, 즉 무의식까지도 포함한 개념이다. ‘타자’개념이 성립하려면 다른 한쪽에 ‘나’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이 ‘나’는 누구인가? 기존 수필에서 화자인 ‘나’가 서정적 화자로서 정서와 사고를 독립적으로 이끄는 동일성의 자아로 이해되었다면, 이 글에서 조명하려는 ‘타자’의 반대 항으로서의 ‘나’는 ‘주체’로 구성되어간다. 어떤 실체나 고정점에 정박하지 않은, 언제나 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는 주체는 내부적으로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있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 ‘나’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뜻밖의 만남이나 사건을 통해 자신을 능동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다.
대상이나 심경, 추억 등의 부딪침을 통해 ‘나’는 “붓 가는 대로”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변화하게 된다. 김광섭의「소고」를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진실을 만들어가는 불완전하지만 열린 주체로서의 성찰적 ‘나’라는 화자를 수필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수필은 주체가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 사물과 세상을 향한 성찰적 시각을 얻는 ‘사건’이 일어나는 문학적 ‘장소(place)’가 된다.
부딪침의 ‘사건’과 성찰적 ‘나’로서의 화자 개념은 특히 재미한국수필을 새롭게 읽을 비평적 지평을 제공한다. 재미한국수필은 대체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토로하거나 이민경험을 기록하는데 그치는 문학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작가들이 낯선 시공간에 놓인 이민주체의 부딪침과 성찰적 변화를 조명해 왔다. 이민생활의 부침을 겪는 주체에게는 이식된 땅, 타향뿐 아니라 두고 온 고향까지도 낯설어 진다. 낯선 경험은 물론 타향살이에서만 비롯되진 않는다. 삶은 본원적으로 낯설다. 탄생의 순간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생경함을 표현한다. 어떤 삶이라도 본래 낯선 것이라면, 이민주체는 그 낯선 삶을 가장 낯선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이 낯섦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붓을 잡게” 만든다.
이민주체는 늘 ‘타자’와 부딪친다. 이들의 ‘타자’는 낯선 이방(異邦)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 사물, 어떤 상황일 때도 있고 내면 자아일 때도 있다. 어떤 것이든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때 주체는 삶에 대한 본원적 소외와 이질감, 내면적 갈등과 변화의 첨예한 현장에 놓이게 된다. 이 글에서는 박봉진의「날개」와 정옥희의「싼페드로 항구가 여는 아침」, 두 편의 수필을 꼼꼼히 읽으면서 이민주체가 낯섦과 마주하는 방식 그리고 그 낯선 부딪침을 통해 어떻게 화자가 성찰적 주체로 변해 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낯선 만남 앞에서 “스스로 붓을 들어” 수필을 쓸 때 시나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분석의 대상이 된 ‘나’는 자아와 세상을 성찰적 시각에서 바라볼 위치를 얻기 때문이다.
2. 박봉진의「날개」4)
박봉진의「날개」는 낯선 대상과의 부딪침으로부터 저절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단순하지 않다. 화자는 어느 날 오후 예기치 않은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선입견 탓에 연달아 일어난 착각을 반성하게 된다. 화자가 새를 날려 보내면서 자신의 착각에도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내기 까지 두 가지 일화가 시청각적 이미지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의미를 직조한다.
첫 번째 일화는 외출준비로 부산한 아내의 소리로 시작된다.
아내의 외출은 집안에 작은 소란을 피우고 나서 시작된다. 웬만큼의 세월을 살았건만, 분주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헤어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 병뚜껑 딸각거리는 소리, 옷장 문 여닫는 소리(...) 종종걸음으로 화장실과 부엌순례를 끝내고도, 몇 차례 현관문이 퉁탕거린 후에야 겨우 바람 분 뒷날처럼 집안이 조용해진다(16쪽).
아내가 전면에 등장하거나 화자에게 응대하는 직접적 묘사가 없는데도 화자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아내의 존재는 크다. 화자는 옷 시중을 해달라거나 차 시동을 걸어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짐짓 불평하고 있지만 종종대며 집 안팎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아내를 은근한 사랑을 담아 묘사한다. 무엇보다 아내가 외출준비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를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위에 인용한 글 서두의 아내에 대한 묘사는 우연이 아니다. 아내는 마치 새처럼 움직인다. 새 한 마리가 집안에 들어와 “딸각거리고” “종종”, “퉁탕”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아내에 대한 이러한 청각적 묘사는 두 번째 일화로 연결된다. 아내가 외출한 뒤 얼마 안 있어 또다시 “토닥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화자는 아내가 또 칠칠맞게 뭔가를 빠트린 것으로 넘겨짚는다. 부주의한 아내가 못마땅해서 아내를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급기야 화자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해주려고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그곳에 아내는 없고, 새 한 마리가 부엌창문에 붙어서 “푸닥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실바닥에도 한 마리가 떨어져 있었다. 화자는 두 마리의 새를 보면서 여전히 아내 탓을 한다. 정신없이 나가다 문을 열어놓았다고 넘겨짚는다. 아내는 종종 뒷문을 닫는 것을 잊곤 했다. 그때마다 벌새가 들어와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고, 파섬(possum)이 들어왔을 때는 아내가 혼절까지 하지 않았던가. 화자는 지난 일을 들먹이면서까지 아내를 질책한다. 하지만, 화자의 착각이었다.
나는 거실의 소파를 돌아서 현관문 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제 어찌 된 영문일까? 현관문은 닫혀 있었고, 새가 들어 왔을 만한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내 정신을 의심하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보고, 손등으로 눈꺼풀을 문질러 보기도 했다(18쪽).
마치 환상지대(twilight zone)로 들어간 듯하다. 눈을 비벼 볼 정도로 믿기 어려운 상황을 주체가 맞닥뜨린 것이다. 어떤 대상이 현실구조 바깥에서 들어와 글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주체가 타자와 마주치는 ‘사건’은 이 장면에서처럼 비현실적인 환상처럼 느껴지면서 현실적 시공간을 낯설게 만든다.
화자는 이 환상지대를 통과하면서 성찰적 자아로 변해간다. 아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심리적 착각과 달리 여기서 화자는 물리적 ‘착각’을 경험한다. 화자의 성찰은 이 착각에서 벗어나 “어쨌든 새를 먼저 집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는 현실적 판단에 출발한다. 거실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를 조심스레 손에 쥐어 들며 화자는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를 떠올린다. 이 상황에서 ‘절대자’인 화자의 손에 잡힌 미약한 존재인 새는 화자가 안전하게 날려 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새는 마치 절대자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과도 같다. 화자는 한때 절대자의 뜻을 모르고 방황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새에게 압박을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화자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더라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기도 하는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를 사색한다.
화자는 새를 동쪽으로 날려주고 나서 두 번째 새를 잡으러 들어온다. 종작없이 날라 다니는 새를 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화자는 허둥댄다.
거실에서 이리저리 나는 통에 몇 번이나 유리창문을 들이받았고 가구 위의 작은 액자들을 넘어뜨렸다. 새의 소란도 파업 궐기같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작은 흔들림 후에 큰 흔들림이 뒤따르는 지진처럼 여기저기서 불쑥거렸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19쪽).
새를 잡으러 여기저기 부딪히고 소란을 떠는 와중에 알 수 없는 연쇄반응 같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화자는 멈춰서 상황파악을 한다. 알고 보니 파이어프레스 안에 들어있던 새들의 움직임이었다. 화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새가 집안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이제 모두 여덟 마리의 새가 방안으로 날아 들어와 푸닥거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나씩 잡기가 어려워져 뜰채로 한 마리씩 잡아 모두 같은 방향인 동쪽으로 날려 보낸다. 길 잃지 않고 서로 잘 만나서 함께 여행을 떠나라는 마음씀씀이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일화의 끝이다.
새들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미스터리는 풀린 셈이다. 적어도 현실적 설명은 가능해졌다. 하지만, 비현실적 환상의 경험은 여전히 남아있다. 처음 새의 출현을 목격하던 순간부터 여러 마리의 새들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장면까지를 화자의 심리적 상태의 객관화라고 볼 수 있다. 텅 빈 집에 남게 된 화자가 이유 없이 아내를 트집 잡았던 마음이 새들의 출현으로 출렁인다. 화자의 사유는 아내에 대한 속 좁은 착각에서 비롯되어 새들이 불러일으킨 ‘착각(혹은 환상)’을 가로지르고 나면, 수필 전체를 두고 볼 때 얼핏 사족처럼 보이는 한 대목에 이르러 환경론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점점 투기대상이 되어 사라져가는 자연과 미국 초기의 식민 역사를 아우르면서(19-20쪽) 피와 편견으로 물든 미국 땅의 역사로 종횡무진 확대된다. 새들의 갑작스런 출현이라는 부딪침이 이끄는 대로 붓을 집어 들고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나들며 무심한 듯 글을 써감으로써 김광섭의 ‘무형식의 형식’을 획득한 것이다.
새들이 떠나고 남아있는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어있다.
그놈들이 파이어프레이스 안의 그을음을 풀무처럼 날갯짓으로 마구 불어냈고, 또 몸에 묻혀서 사방으로 날아다녔기 때문에 거실바닥과 창문틀엔 새까맣게 그을음이 앉았고 매일 아내가 먼지를 터는 아이보리색 가죽소파 역시 온통 그을음을 뒤집어썼다(21쪽).
이제 사태는 바뀌어 화자가 아내에게 잘못을 저지른 처지가 된다. 이를 화자는 모두 순전한 자신의 착각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가 느리고 잘 잊는다는 선입견과 새들이 들어온 것을 몰라 신속히 처리 못한 자신의 탓이다. 화자의 깨달음은 개발주의자나 백인정복자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도 상통한다. 모두 선입견과 편견, 상대방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된 해악이기 때문이다. 이제 화자는 이런 사색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 고집스런 착각에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낼 준비를 한다.
그 착각이란 것은 때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이 탈이다. 그러나 마음먹기 따라서는 신속히 날려 보낼 수 있는 가변의 날개를 달 수 있지 않은가. 그 기미가 언뜻 보이기만 하면 나는 지체 없이 그것에 날개를 달아 줄 테다. 후회는 행위에 매여서 끈처럼 뒤따라 올 텐데 그것에 앞서면 모두가 편안할 테니 말이다(21쪽).
3. 정옥희의「싼페드로 항구가 여는 아침」5)
아직도 어둠이 검북청색으로 어른거리고 있는 새벽에 “물기 어린 공기”를 느끼며 화자는 산책을 시작한다. 걷기와 여행은 재미한국수필의 단골소재이다. 이미 고향을 떠나온 주체는 반복해서 어디론가 떠나려고 한다. 새로 정착한 곳은 삶의 터전일지언정 고향은 될 수 없다. 하지만, 돌아갈 고향은 없다. 세상은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민주체는 낯선 곳을 향해 정처없이 떠나고 어디에도 없는 마음의 고향을 찾으려한다. 정주하지 못하는 영혼이 생활에 묶여 떠나지 못할 땐 낯익은 거리로 나간다.
이 글에서 화자는 주치의의 조언에 따라 산책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마치 산책이 일이나 의무인 듯이 말하지만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에 대한 묘사는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산책이 어떤 존재의 부름에 부응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검북청색 어두움이 서성이는 신새벽에 문을 밀고 밖에 나왔다. 물기 어린 공기가 뺨에 와 닿는다. 잔디밭으로 내려섰다. 젖은 양탄자를 밟은 양 발바닥이 포근하게 물이 차오른다. 아침 이슬이 흠뻑 내려와 주었는가 보다.
싼페드로(San Pedro) 항구 쪽이 수줍은 복숭앗빛으로 물드는가 했더니 차차 오래가 붉은 색으로 넓게 번져나간다. 바야흐로 여명이 시작되는 참이다(29쪽).
해 뜨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수줍은” 복숭아 빛이 어떤 색인지 궁금해진다. 당장에라도 여명의 순간을 목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의 여명은 싼페드로 항구라는 특정 지명의 것이다. 매일 아침 세계 곳곳에서 여명이 시작되지만, 이 글에선 화자가 딛고 선 땅의 여명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물기 어린 공기”나 “포근하게 차오른다”는 표현은 구체적 장소의 시간적 변화, 자연적 변화를 생생하게 그린다.
이 지방색 짙은 여명의 순간은 이 글에 고유한 정취를 부여해준다. 흔히 수필에서 등장하는 산책하는 화자의 시선과 상념이 자신의 감흥이나 감정에 빠져있을 때 풍경이나 대상은 구체성이나 고유성을 잃게 된다. 정옥희의 글에선 풍경이 화자를 부른다. 화자는 여명의 새벽에 부딪쳐서 산책을 나간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주섬거리며 옷을 챙겨 입고 운동화도 찾아 신었다. 집 둘레를 한바퀴 걸을 참이었다. 엊그제 주치의 오박사는 나에게 콜레스테롤 수치가 좀 높으니 걸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찰 시 매듭이 굵은 손을 내밀며 주춤거리자 젊은 의사는 서슴없이 말했다. “이 손은 자랑스러운 손이지 부끄러운 손은 아니지 않습니까?” 했다. 요즘의 젊은이 중에도 저렇게 사려 깊은 말을 할 줄 아는 이도 있구나 싶어 가상하게 느껴졌다(30쪽).
노동으로 굵어진 손을 내미는데 주춤하는 화자에게 자랑스러운 손이라고 말해준 주치의를 고마워한다. 여명의 새벽이 산책의 흥을 돋우고 그 흥이 주치의를 떠올리게 되는 과정은 맺힌 데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런 자유연상은 아이비(Ivy)줄기가 너무 변화가 없어서 싫다(30쪽)는 개인적 감정표현과 화자를 졸졸 쫓아오던 집개의 이야기로 계속 이어진다. 아이비와 개에 관련된 대목을 꼼꼼히 살펴보면 간단치 않은 복선이 깔려있다. 가령 아이비가 “게으른 사람의 풀꽃”이라 싫다고 하는 대목은 세상의 변화에 뒤쳐져 있는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과 연결된다. 이어지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해가는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화자는 변화에 사려 깊게 반응한다.
개를 쫓는 대목은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으로 시작한다.
길모퉁이를 도는데 서걱거리며 누군가가 내 뒤를 밟는 것 같이 느껴졌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선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 집의 점박이 작은 개였다. (...) 그렇게 개를 쫓느라고 나는 집까지 되돌아와야만 했다(30쪽).
여명이 깔린, 아직 어둑한 시간 인적 드문 길에서 산책은 불안하다. 뒤따라오는 것이 개라고 확인했을 때 두려움은 안도감으로 바뀌지만, 한적한 교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후 화자는 산책길에서 두어 번 사람들과 마주치고 남의 집 개도 보게 된다. 이런 대목들은 짐짓 안정된 중산층 교외 주택가의 흔한 정경이지만 그 이면에는 선과 악, 행과 불행, 안정과 불안, 권태와 긴장 등의 이원적 가치들에 대한 화자의 예민한 시각이 스며있다.
화자는 산책 중에 두 번 ‘부딪친다.’ 한번은 두 명의 젊은 남자가 뒤에서 걸어와 화자가 자리를 내어준다. 앞서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 그들이 꺾어 돌아간 산책로를 들여다보니 두 남자가 손을 잡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윌로우 스프링 트레일(Willow Spring Trail) 말길로 꺾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늘 이 길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가파르고 골이 깊어 무서워서 용기가 나지 않던 곳이었다. 그들을 따라 들어갈까 하다가 두 젊은이가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으며 내 인생은 늘 제자리걸음으로 살아온 것을 새삼 느꼈다. 세상은 많이 변해 있는 것을. 누구나가 스트릭(Strict)하다고 공인하는 이 산 속 오지에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이미 들어와 있지 아니한가(32쪽).
집에서 나와 보니 많이 변한 세상이 하나씩 나타난다. 화자에 의하면 “스트릭(strict)” 한 “산속 오지”가 자신의 생활터전인데 그곳까지 밀고 들어온 변화의 물결-- 이 경우엔 동성애자 커플 -- 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체념적 수용이라고 하기에는 넉넉하고 유연한 시각이 엿보인다.
두 남자가 사라진 산책로는 화자가 늘 가보고 싶었으나 무서워서 용기가 없어 가지 못했던 곳이다. 그곳은 가파르고 골이 깊어 무섭지만 들어가 보면 어떤 변화를 경험할 만한 곳이다. 마치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연상케 하는 이 대목에서 프로스트의 시적 화자와 달리 이 수필의 화자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아마도 두 남자에게 그 장소를 조용히 내어주려는 의도였는지 모른다. 그 길은 손을 잡은 두 남자들을 위한 것이지 화자의 것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이기도 하다. 두 손을 잡은 남자들이 걸어 들어간 그곳은 화자에겐 금지되지 않은 금지구역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부딪침은 오르막길에서 내려오다가 만난 한 여인이다. 처음 보기에 그녀는 “히스패닉 같기도 하고 동양계 같기도” 하다. 여인은 자신을 남미에서 오래 살았던 중국계 소설가로 소개했다. 화자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이와 마주할 때 남녀의 성과 인종에 근거한 구별 짓기가 몸에 밴 사람이다. 이 글에서 화자는 두 차례에 걸쳐 변해가는 세상의 타자들에 대한 무의식적 선입견을 드러낸다. 선입견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주저 하지 않고 자신의 “제자리걸음”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게다가 이 두 번째 일화에서는 중국계 여성과 화자 사이에 발견된 공통 이해관계 -- 작가라는 사실과 일본을 싫어한다는 점--를 찾아서 구별 짓기에 따르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나름 노력한다.
한편 화자는 변해가는 세상과 부딪칠 때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쌍꺼풀 수술을 권했던 안과의사가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 눈이 시려오고 눈물이 자꾸 나오지만 화자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쌍꺼풀수술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여전히 타협 불가능한 고정관념, 혹은 화자가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기 마련이다. 쌍꺼풀수술은 절대 못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난 화자는 곧이어 땀을 닦으려고 무심코 옷섶 자락을 들어 올린다. 배꼽이 보일까 걱정되지만 이 나이에 어떠랴 하면서 자신이 점점 능글맞아진다고 한다(33쪽). 김광섭은 수필이 단지 기록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머”와 “위트”가 필요하다고 했다.6) 화자가 자신을 ‘능글맞은 여인’이라 부르는 대목은 유머를 적절히 가미해 자신의 고정관념을 고집하면서도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어가는 화자의 유연한 태도를 밋밋하지 않게 전달해준다.
정옥희는 노년의 처지가 손을 내보이기 어려울 만큼 부끄럽고 책을 읽기 힘들만큼 불편하며 콜레스테롤 걱정으로 억지 산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능청스럽게 삶을 관조하고 살면서 전전긍긍했던 터부와 금기도 가끔은 슬쩍 넘길 수 있는 성숙한 주체의 위치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의 화자는 늙어가는 자신과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렵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 사이의 괴리와 불협화음을 긴장과 여유로 조정해간다.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받아들이기 -- 이는 타협이 아니다. 포기나 굴복도 아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손마디가 굵어지고 눈꺼풀이 내려앉는 육체적 노쇠에도 화자는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을 훌쩍 넘지 않으면서도 서서히 시선을 밖으로 향한다. 이런 화자의 태도는 마지막에 카터대통령처럼 환하게 웃는 장면에 담겨있다.
앞뜰에 닿았을 때는 내 입에서 단 김이 뿜어져 나왔다. 두 손녀가 손나발을 불고 있었다. “하알머니이...” 아이들을 보고 즐거워진 나는 카터대통령의 웃음스타일로 앞니 열두 개가 다 보이도록 웃는다.(33쪽)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안개는 걷혔다. 새벽 안개가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터널 같은 것이라면 산책을 마친 아침 10시는 그녀가 세상과 부딪치고 돌아온 환한 시간이다.
4. ‘사건’으로서의 수필 쓰기
수필의 맛은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문제나 어떠한 대상에 작가의 기분이 부딪쳐서 표현되는 인간미에 있다. - 김광섭, 「수필문학소고」(인용자강조)
이 두 수필은 재미한국수필에 기대되는 천편일률적인 소재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상실감, 향수 어린 추억 혹은 이민생활의 고된 노동과 박탈감 등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내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정옥희의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보자. 정옥희는 자신의 심산했던 이민생활에 대해 신세 한탄을 하지 않는다. 다만, 굵은 손가락 마디가 부끄러워 의사에게조차 보여주기 싫어하는 마음의 표현을 통해 그녀의 고되었던 생활을 독자가 느끼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박봉진의 글에는 아이들이 타 도시로 떠나 부부만 남은 집이라는 공간이 있다. 새를 잡느라 분주한 한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상하는 독자는 어느새 그 빈 공간의 적막함을 느끼게 된다.
정옥희와 박봉진의 수필집에 수록된 다른 글들에는 물론 고향의 이야기, 흔한 이민생활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필집을 다 읽은 독자라면 두 수필가가 다루는 소재의 폭과 깊이를 이미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수필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라도 이 두 편의 수필에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은 것들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 수필이 우리의 마음에 깊게 울림을 준다. 행간을 통해 우러나오는 의미는 수필가의 필력에 달려있다. 두 수필가는 주제를 내세우는 대신 대상과의 부딪침이라는 사건을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전달한다.
사연은 달라도 각자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고 미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아온 이민 1세대 정옥희와 박봉진의 글은 이미 갈등과 상처를 겪어 지나온, 세월의 풍파를 거쳐 온 사람들의 표면적으로 정적인 삶에도 여전히 부딪침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꿈을 이룬 인간의 삶에도 부딪침은 일어난다. 사건은 중단되지 않는다. 두 수필작가는 안정된 삶의 표면장막을 찢고 파이어프레스를 통해 집안으로 날아드는 새들과 평안한 교외의 아침 산책길에 의도하지 않게 목격하는 색다른 정체성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섬세한 감수성과 성찰적 사유로 이민주체의 문학적 성취를 한 단계 높여주었다. 이로써 이 두 수필은 ‘사건’이 되었다.
1) ‘부딪치다’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또는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이) 힘있게 닿아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부딪다’의 능동적 형태이다. ‘부딪히다’는 이와 달리 수동적 형태이다. 주어의 행위에 따라 능동인지 수동인지 구별해서 사용된다. 김광섭의 글에서 능동적 의미의 ‘부딪치다’가 사용된 것은 따라서 수필작법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2) ‘사건’의 개념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발전시켰다. Alain Badiou, Being and Event (Continum: 2005).
3) 주체’와 ‘타자’의 이론적 개념에 대한 대략적 이해는 현대철학, 특히 정신분석이론에 따른 것이다.
4) 박봉진 수필집, 『언제나 내 마음 바다에 살아』 (2004: 선우미디어)에 수록됨. 이 글에서 따온 인용문의 철자법, 표기법, 문장구조 등은 모두 원본 그대로임을 밝혀둔다.
5) 정옥희 수필집, 『로우링힐스의 여인들』 (2000: 동화서적)에 수록됨. 이 글에서 따온 인용문의 철자법, 표기법, 문장구조 등은 모두 원본 그대로임을 밝혀둔다.
6) 직접 인용하면, “수필은 잡다한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素性)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 이 천성(天性)스런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속상을 갖추지 못한다면 수필은 그저 무미건조한 생활적, 심경적 기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김광섭, 「수필문학소고」) 라고 했다. 수필작가들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수상소감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독자가 찾지 않는 글은 메아리를 동반하지 않은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 읽는 사람도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수필평론이라는 낯선 곳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재미 원로수필가 두 분의 수필을 읽으며 보낸 시간은 제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을 이루어 아직도 흐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도 그 물결이 닿기를 바랍니다. 제 평론을 읽은 독자가 이 두 작가의 글을 찾아 읽게 되면 좋겠습니다. 재미한국수필을 오랫동안 일구어 온 많은 작가들과 당선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척박한 이민생활에서 ‘스스로 붓을 들고’ 글을 써오신 분들이 있어 제 글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2014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