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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자"

San Francisco

2003.11.25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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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석<정신과 전문의>
1866년 가을, 44세의 중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집필하던 중이었다. 당시 그는 도박 때문에 한 출판업자로부터 3천 루블을 차용한 상태였다. 11월 1일 까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면 앞으로 출판할 모든 작품의 저작권은 출판업자에게 넘긴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 기일에 맞추기 위해 속기사의 도움을 얻어 [죄와 벌] 대신 중편 [도박자]를 26일만에 완성시켰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자신이 차차 도박에 빠져드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으며 또 도박이 얼마나 심각한 중독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주인공 알렉세이는 해외에 사는 러시아인으로 학식이 높고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었지만 성격은 아직 불안정한 편이었다. 그는 당시 룰레텐부르그라는 도시에 잠시 머무르던 한 장군 댁의 가정교사였으며 장군의 질녀인 폴리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룰레텐부르그란 가상 도시는 도박의 일종인 룰렛을 연상시키며 폴리나는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 사랑에 빠져있던 당시의 애인 폴리나의 이름이다.)
그는 폴리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의 생명이라도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그러자 폴리나는 알렉세이에게 돈을 쥐어 주면서 도박장에 가서 자기를 위해 돈을 따오라고 부탁한다.
처음으로 도박장에 들어서면서 알렉세이의 심장이 뛰고 가슴이 설렌다. 그는 폴리나에게 지닌 희망을 모두 룰렛에 건다. 첫 번 주사위에서 그는 돈을 잃고 낙심하지만 다음 번부터 운이 터서 자정까지 계속 돈을 딴다. 그는 그 돈을 모두 폴리나에게 갖다준다.
그러나 그 사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룰렛에 맛을 들였다. 도박이란 돈을 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게임이란 운명에 반항하고 이에 도전하는 방법이었다. 다음날 그는 하루 종일 돈을 따고 나서도 도박판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미지의 운명을 눈앞에 둔 도전자로 생각했다. 그 날 밤으로 그는 모든 돈을 잃고 말았다.
며칠 후 폴리나의 할머니가 룰레텐부르그에 도착했다. 그녀는 76세의 돈 많은 과부였다. 룰렛 판에 인도된 이 할머니는 가장 확률이 낮은 번호에 돈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맞아 떨어져 돈을 많이 땄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그녀는 잠시를 참지 못하고 도박장으로 달려갔다. 결국 돈을 모두 잃고 그녀는 무일푼이 되어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런데 알렉세이는 도박장을 떠날 수 없었다. 도박에 대한 집념이 폴리나에 대한 애정보다도 더 강했던 것이다. 할머니가 떠나자 폴리나는 알렉세이에게 자기가 전에 그에게 도박을 부탁한 이유는 5만 루블이나 되는 빚을 구실로 자신을 농락한 옛 남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고 힘든 고백을 한다. 알렉세이는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줄 생각은 않고 돈을 벌어 그녀의 빚을 갚겠다고 도박장으로 달려간다.
그는 계속 돈을 걸면서 폴리나의 존재나 도박의 목적조차 잊는다. 우승의 확률이 낮았지만 그는 판돈의 액수를 불려가면서 흥분과 스릴의 정점에 달한다. 그의 마음을 잡는 것은 판돈을 몰아 올 때의 쾌감만이 전부였다. 자기 방에 돌아오면 옆에 앉아 있는 폴리나 조차 안중에 없었고 오직 딴 돈을 세어보는 데만 열중했다. 폴리나는 애정을 가지고 어렵사리 힘든 고백까지 하며 보여준 정성이 모두 무시당하자 그가 룰렛으로 벌어다 준 5만 루블을 그의 얼굴에 던져 버리고 방을 뛰쳐나간다.
이때부터 알렉세이의 인생을 일정한 규칙을 잃고 마치 룰렛 바퀴같이 앞날을 모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유럽 각지의 도박장을 전전하면서 돈을 따기도 잃기도 한다. 돈을 구걸하는 거지 생활도 하고 빚을 갚지 못해 감옥 신세를 지기도 한다. 막노동을 해서 돈 몇 푼이라도 손에 들어오면 그는 룰렛 판으로 달려갔다. 단지 한 순간에 불과한 승리의 쾌감을 위해 그는 기꺼이 매일 겪는 비참한 패가망신의 삶을 계속했다.
그는 도박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지만 항상 "내일" 또는 "한번 돈을 따면"이라는 구실을 내세웠을 뿐 결코 "내일"이 없이 도박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이 단계에서 주인공 알렉세이는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심한 중독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 [부인]하는 상태에 도달해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바로 그 무렵 도스토예프스키가 처해 있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근래에 상영되는 [앨릭스와 에마](Alex and Emma)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자"를 쓸 무렵의 상황에 착안하여 무대를 현대로 옮겨 전개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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