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 그 바람을 맞고 오셨는지 칠순이 넘으신 어르신의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지셨다. 그런 어르신들을 뵈면 아직도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만년 여자의 자존감에 나의 편견을 내놓는다. 여자에게 예뻐지고 젊어지고 싶어하는 갈망은 영원한 무죄라고 부추기고 싶다.
톰보이처럼 여성스러움에 무관심했던 나는 민낯으로, 젊음이라는 장식 하나로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했다. 그러던 어느 때부턴가 거울 속에 비친 볼품없는 내 얼굴이 수분빠진 과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50줄에 들어서는 눈화장도 하고 립스틱도 수줍게 바른다. 젊음 하나 믿고 버틴 자신감에 백기를 든 셈이다. 시계를 돌려 젊어질수 있다면 여자들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과감하게 투자할 것이다.
한국은 성형의 중병에 걸렸다. 매스컴이 부추긴다. TV 프로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 모두 인형같다. 환갑이 넘은 나이엔 눈가의 잔주름도 있을법 한데, 오히려 젊었을 적보다 더 팽팽하고 예쁘다. 성형 덕분이다. TV를 시청하다보면 진행자들이 못생긴 사람을 서슴없이 죄인 취급하는 외모지상주의 멘트에 심기가 자주 불편하다. 못생긴 사람이라고 자존심도 못생긴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람 됨됨이나 인격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외모로 대접하고 평가하는 게 영 못마땅하다.
세상은 얼마나 방대하고 다양한지 같은 종류의 나뭇잎도 모양새나 배열이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우주에 수많은 사람이 타고 내려도 똑같을 확률은 일란성 쌍둥이라도 없다. 그 독창성 하나로도 우린 충분히 소중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밖으로 보이는 외모가 덜 예쁘다고 미안해야 하고 주눅들어야 하는 사회는 분명 건강한 사회는 아니다. 엄마가 “밥은 먹었니?”하고 걱정하고 챙기는 사람은 잘 생긴 배우가 아니라, 못생겨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자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람에게 소중하고 사랑스런 존재다. 그런 사람을 외모 하나로 깎아내리고 웃음거리를 만드는 건 부당하다.
평소 문신은 절대 하지 않으리, 얼굴에 칼을 대지 않겠다는 나름 소신을 가졌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생긴대로 자연이 데려다 주는 나이만큼만 늙어가겠다는 개똥철학 하나 때문이다. 내 얼굴 생김새에 대한 불만이 없는건 아니다. 안경이 걸터앉을 만큼 코가 조금 높았으면, 왼쪽 볼에 꿰맨 흉터를 지웠으면, 듬성듬성 난 눈썹이 짙었으면 하는 바램은 있었지만 수술로 고칠만큼 절실하지는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일찍 포기한 이유는 포기하고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다. 인생이 가질수 없는 것에 집중하면 웃을수 없고 내 행복의 수치는 수시로 내려간다.
그런 내가 무슨 마법에 걸린양 남편 몰래 일을 하나 저질렀다. 교회 갈 때 일주일에 한번 화장하는 외모에 무신경한 나에게 눈썹의 듬성듬성한 공간을 문신으로 메꾸면 자기 눈썹처럼 감쪽같다고 꼬득이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어떤 친구는 어찌나 적극적인지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대신 아예 미용실에 예약까지 해주면서 나를 등 떠밀었다.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남편의 성격을 잘 알고, 나 또한 그런 일에 맞장구를 쳤던 터여서 많이 망설였다. 정말 남편이 몰라볼까 물었다. 친구는 그렇다고 천연덕스럽게 장담을 한다. “너무 자연스러워 그 누구도 몰라볼 정도로 감쪽같다”며 자기 눈썹을 증빙서류마냥 자랑스럽게 들이민다. 듬성듬성 난 양미간이 또렷해지면 밋밋한 내 얼굴도 좀 똘똘해 보일거라는 기대에 힘입어 문신에 눈썹을 맡겼다.
집에 들어와 지은 죄가 있어 앞머리로 양눈썹을 가리고 남편과 거리를 두고 밥을 먹었다. 남편이 식탁에 앉으면 난 개수대에서 일 하고, 남편이 TV를 시청하면 나는 서재로 자리를 옮겨 의심의 레이더망을 피해 시간을 벌 심산이었다. 얼굴의 작은 변화도 금방 알아차리는 그를 따돌리느라 신경을 써서인지 그날은 아주 피곤했다. 상처가 아무는 삼일이 고비인데 하루를 무사히 잘 넘겨 내일은 더 무사할 줄 알았다.
다음 날,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폭설로 온 도시가 마비되고 우울하던 애틀란타의 빙하기 이후, 처음으로 나온 밝은 햇살이 문제였다. 그 밝은 햇살이 얄밉게도 창가에 앉은 나를 남편에게 고자질할 줄이야!
밝은 곳에서 선이 짙은 내 눈썹을 이상한 눈으로 주시하던 남편은 다정한 여인이 입맞춤할 때 간격으로 좁혀서는 내 얼굴에 나타난 변화를 찬찬히 뜯어보며 범인을 문초하듯 묻는다. “뭘 한거야? 무엇을 발랐길래 흉측해? 딴 사람 같아. 빨리 지우지 그래!” 맞장구치기 싫은 질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지울수 있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 무거우랴. 그의 말에 부동자세로 서서 “지울 수 없는거야!”라고 볼멘소리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뛰쳐나왔다. 이미 마음고생이 시작된 나의 억울함이 그 대답에 생생히 묻어있었다.
남편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금새 감을 잡은 것 같다. 그의 큰 눈알이 튕겨나와 두손으로 받아내야 할 정도로 커졌다. 두말할 것도 없이 냉전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나도 모른다. 지은 죄가 있으니 꼬리를 내릴밖에…. 있는 그대로를 사수하던 내가 잠깐 흔들렸다. 남편은 핸드폰 계약이 만료되어도 고장나지 않으면 바꾸지 않는다. 새 것의 편리함이 헌 것의 익숙함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바라본 나는, 함께 세월을 건너다 골이 깊이 패인 주름진 얼굴이다. 나이만큼 나온 뱃살도, 속살이 들여다 보이는 성근 머리도 그가 아는 나다. 듬성듬성 난 눈썹까지도 익숙함에 길들인 내 얼굴이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 남편의 몫이 들어있어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