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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연민

New York

2014.09.0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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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순 / 자유기고가
'한오백년'이란 노래의 2절 가사에 '동정심 없어서 못 살겠네'란 구절이 있다. '동정'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남의 슬픔 불행 따위를 이해하며 상대방과 같은 느낌을 가짐'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흔히 동정심은 주는 사람은 별 생각 없이 측은한 마음에 말을 내뱉고 받는 사람은 전보다 더욱 비참한 기분이 된다.

반면에 비슷한 뜻의 '연민'이라는 말은 '남을 불쌍하고 가엾이 여김'이라고 단순하게 나와 있다. 나는 진심으로 상대방과 아픔을 공유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연민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인들과 식사 중 연민과 동정의 차이를 물으니 동정은 그저 불쌍하다고만 보는 마음가짐이고 연민은 진정성 있는 참한 마음이라고들 했다. 일반적인 생각이 그렇다면 그 흔한 동정심마저 없는 이 시대를 향해 연민을 느낄 것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에게 젊은 엄마들에게 나이 드신 어르신들에게 구박받는 강아지들에게 버림받은 고아들에게 전쟁 중에 고통 받는 모든 이들에게 연민을 품을 것이다.

지난달 한국을 다녀가신 교황은 길을 가시다 멈춰서서 이제는 세간의 관심 속에서 멀어져 가는 세월호 유가족의 손을 잡아 주었다. 왼손을 가슴 위로 가져가 얹고 바라보는 그 연민 가득한 눈빛에 난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모모' 란 소설이 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인 모모는 벙어리인 양 말을 안 한다. 하지만 모든 이의 이야기에 온마음을 다해 들어준다. 들어주다 힘들어 지쳐 쓰러지기도 하는데 모모를 통해 말을 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고 상처가 치유됨을 느낀다. 모모는 현자의 모습을 닮았다.

인도의 철학서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의 모든 현자의 눈에는 연민으로 눈물이 그득하다.' 나는 "Lord have mercy on us(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매주 기도한다. 삶이 아프고 고달퍼서 가엾이 여겨 달라고 부탁한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누구나 종교심은 있어서 무슨 말끝마다 "Oh my God… Jesus Christ!" 하지만 반드시 신앙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태초에 신의 모습을 닮게 만들어진 우리가 마음까지 닮으려하는 노력이 신앙일 것이다. 남이야 어찌 되든 나만 잘 먹고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가득한 사람들이 어찌 신앙인이겠는가.

나의 아버님은 참으로 병약하셨다. 중학교 때는 턱걸이 하나 못하고 공부도 흥미가 없어서 건성으로 학교를 다니셨다고 한다. 아버님을 바꾼 것은 후줄그레한 양복을 입고 어눌한 말투로 가르치시던 생물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선생님을 보고 일제 감옥에 갇혀 소식도 없는 할아버지가 연상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생물 선생님에 대한 그런 연민의 마음으로 공부도 운동도 열심히 하셔서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교수도 되셨다. 연민은 그지 없이 약해 보여도 이렇게 힘이 있다.

아내가 슬그머니 손을 잡으려 들면 남사스럽다고 뿌리치는 무뚝뚝한 남편. 그 남편의 희끗한 머리를 보면 울컥해지는 아내의 마음. 축 늘어진 뱃살 자글자글한 아내의 모습에 가슴 먹먹해지는 남편의 마음도 연민이다. 누구나 쉽게 말하고 왜곡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몇 배 강한 부부의 정. 그 연민의 아름다움은 간직하여야 할 소중한 것이다.

동정심 넘치는 사회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부부들 신앙심으로 넘쳐나는 교회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바라는 것이 많으면 실망도 크다 했거늘 어찌 가을도 오기 전 피어버린 살살이꽃(코스모스) 마냥 홀로 쓸쓸해지는지 모르겠다. 신이시여 저에게도 연민을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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